복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특별기고] '더불어 살려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프레시안, 기사입력 2011-03-15 오전 9:18:53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논쟁이 국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 그 어느 때보다도 열띠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도 복지에 대한 공방을 하고 있다. 복지 논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아진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지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무엇보다도 무상급식 문제이다. 가정 경제의 조건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에게 무상으로 급식을 해야 한다는 보편적 복지가 진보진영의 주장이고,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에게만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선별적 복지가 보수진영의 주장이다. 보수진영은 부유한 가정의 학생들은 돈을 낼 수 있고 국가 재정도 어려운데 굳이 무상급식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만한 재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진보진영의 무상급식 주장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복지정책에서 재정이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지정책의 근본 목적에 대한 인식이다. 복지정책의 목적은 무엇보다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의 존재의 존재인데, 이 사회적 관계를 지배관계로 인식하는가, 아니면 천부적 인권, 도덕과 자유와 정의의 관계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복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또한 복지는 빈곤의 발생 원인이 개인에게 있느냐,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있느냐 하는 문제인식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복지정책의 목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국가예산 편성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재정 문제보다 복지에 대한 목적의식과 철학이 더 중요하다.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의무이자 국민의 권리
국가의 근본 목적은 모든 국민의 평등한 사회적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는데 있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 복지정책은 근본적으로 자선이 아니라 인권, 시민권, 사회권에 근거한다. 자선은 개인적 행위이지 국가의 정책이 될 수 없다. 유럽의 국가들은 인권, 시민권, 사회권에 근거해서 모든 사회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별도의 분야별 복지정책이 없고 모든 사회정책이 곧 복지이다. 반면, 미국은 복지를 국가의 의무로 인식하지만,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복지를 사회정책의 한 분야로 인식한다. 이렇게 유럽의 국가들과 미국의 복지정책이 다른 것은 두 나라들의 이념체제와 빈곤의 원인에 대한 문제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이념체제 측면에서 보면, 유럽의 국가들과 미국은 모두 자본주의 국가이지만, 유럽의 국가들은 사회민주주의 이념체제이고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체제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개인 소유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평등차원에서 사회적 공유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국가들은 사회적 평등의 기초가 되는 교육, 의료, 주택을 사적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공유로 인식한다. 교육과 의료는 평생 국가가 무료로 제공하고 주택은 공공 임대주택을 통해 주거안정을 보장한다. 유럽나라의 국민들 대다수는 정부의 공공임대주택에서 생활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 소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체제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이 사회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심하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개인의 소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사회적 불평등 문제는 소득보장 차원의 복지정책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빈곤의 원인에 대한 인식 측면에서, 유럽 국가들은 빈곤의 원인은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불평등한 사회구조적 요인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빈곤의 주된 원인이 되는 교육, 의료, 주택을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보장해서 빈곤을 사전에 예방한다. 미국은 빈곤의 원인이 개인의 책임에 있다고 인식한다. 빈곤에 대한 책임은 개인이 일차적으로 져야 하고, 그 다음에 국가의 복지정책으로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따라서 미국은 유럽 국가들처럼 빈곤을 사전에 예방하는 사회정책이 아니라 빈곤발생 사후에 소득보장 조치로서 별도의 복지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이런 결과로, 미국은 유럽의 국가들 보다 소득격차가 더 크고, 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화되어 있고, 빈곤계층이 더 많다.
선별이냐, 보편이냐가 아니라 차별이냐, 평등이냐가 문제다.
오늘의 국가 복지정책은 유럽은 물론 미국, 심지어 우리나라도 빈민들의 기초생계와 소득보장 차원을 넘어 모든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행복 추구라는 사회문화정책 차원에서 광의적으로 보편적 복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이렇게 국가가 광의적 차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정책은 간과하고, 복지를 빈민문제에만 국한시켜 선별이냐, 보편이냐 하는 논쟁을 하는 것은 복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되지 못한다.
국가가 지원하는 국민의 주거생활 안정과 편리 및 주변 환경개선과 교육과 문화예술기반시설 사업 등은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사회정책으로서의 보편적 복지이다. 특히 상하수도, 전기, 통신, 가정용 에너지, 도로와 가로등 및 가로수 등, 그리고 학교와 문화예술 시설은 가장 기본적인 보편적 국민복지에 해당된다. 물론 이런 기반 시설들을 사용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국민 각자가 지불한다. 그러나 이런 기반시설들을 만드는 비용은 정부가 세금으로 충당한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기반시설들이 보편적 국민복지인데도 불구하고 부자들이 사는 지역과 빈민과 서민들이 사는 지역을 차별한다. 빈민과 서민들이 생활하는 지역에는 아직도 상하수도와 전기 및 통신 설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난방용 도시가스는 더 비싸고 심지어 공급되지 않는 지역도 많다. 또한 도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가로등과 가로수가 없는 곳도 많다. 학교시설도 낙후되어 있고, 문화예술시설도 이들 지역에는 거의 없다.
특히 재개발 및 뉴타운, 한강 르네상스 및 디자인 서울, 자전거 도로 등의 프로젝트 사업은 국가의 발전과 국민 삶의 질적 향상이란 보편적 복지 명분을 가지고 추진되는데, 이런 모든 사업들에서 빈민과 서민은 도리어 억울하게 살던 곳에서 쫓겨나서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자들은 더 많은 개발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디자이너가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에 대해 '서민생활을 포함하지 않고 배제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도시 디자인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다'라고 했다.
더욱이 정부는 낙후지역을 발전시킨다는 보편적 국가복지 명분으로 전 국토를 개발, 재개발 하면서 300조가 넘는 선심성 난개발로 금수강산과 전통마을, 그리고 그곳의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고 일률적인 시멘트 공화국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낙후지역 개발 사업은 그곳에 살고 있는 서민과 빈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내쫒고 그곳을 부자들 차지와 유락시설로 만들고 있다. 특히 이 개발과정에서의 이익은 모두 부자들과 특정 개발 업체의 몫이 되고, 손해가 나면 국민 세금으로 충당한다.
이렇게 부자들은 국가 사회정책만이 아니라 국가의 갖가지 정책을 통해서 이미 학교 무상급식 '공짜' 문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국가의 보편적 복지 특혜를 받고 있다. 실제로 모 재벌그룹 회장 손자에게 왜 '공짜'로 밥을 주려고 하느냐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다. 이 손자는 이미 '공짜' 밥 한 그릇이 문제가 아니라 이 보다 수 천억, 아니 그 이상으로 국가의 특혜를 받고 있다. 헌법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재벌회장 손자와 빈민의 손자는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재벌회장 손자는 재벌 가문에서 태어난 특혜만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정당하지 않은 유산을 정부가 정당한 것처럼 물려주도록 특혜를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불평등하고 불의한 정부 특혜는 이 손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재벌과 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따라서 이제 복지문제의 초점은 선별이냐, 보편이냐가 아니라 차별이야 평등이냐가 되어야 한다.
의무교육에서 학교급식은 국가의 의무이다
다음으로 학교급식 문제인데, 학교급식은 복지 차원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교육, 특히 의무교육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학교급식의 근본 목적은 부자부모들에게 점심 도시락 준비로부터 자유를 주기위한 정책도,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에게 점심 한 끼 무료로 주려고 하는 복지제도도 아니다.
학교급식은 의무교육의 필수적 요소로서, 의무교육에서 학교급식 제공은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이다. 국가가 의무교육 제도를 헌법으로 제정한 것은, 모든 국민에게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중등교육을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고, 동시에 국가발전을 위해서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중등교육까지 받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은 누구나 싫든, 좋든 이 의무교육을 받아야 한다. 받지 않으면 처벌받게 되어있다. 따라서 국가는 이 의무교육 기간에 당연히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 의무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에 온 학생들에게 점심을 주지 않는 것은 무상의무교육의 헌법정신과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그동안 학교급식을 의무적으로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점심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정상이고 의무급식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의무교육에서 학교급식의 근본목적은 3가지이다. 첫째는, 국민건강이다. 국가는 국민 건강을 위해 빈부의 차이를 넘어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의무교육기간 동안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국민 건강과 체력을 향상시켜, 국민이 행복하게 살고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또한 의무급식은 보건의료정책 차원에서 국민건강의료비를 절감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인성과 사회성 함양이다. 학교급식은 단순히 학교에서 밥만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에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하듯이, 친구, 선후배와 같이 한솥밥을 먹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성과 사회성이 함양되도록 하는 중요한 교육과정이다.
셋째, 학교급식은 협동, 단결, 사회통합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학교급식을 통해 빈부 차이를 넘어 서로 포용, 배려, 협동, 단결하는 학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통합, 국민통합에 필수적이다.
교육에는 '명시적인 교과과정'(manifested curriculum)과 '숨겨진 교과과정'(latent curriculum)이 있는데, 명시적인 것보다 숨겨진 교과과정이 인성과 사회성 형성에 더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학교급식은 가장 대표적인 숨겨진 교과과정이다.
따라서 학교급식은 이런 의무교육의 근본목적과 국가발전 차원에서 당연히 의무급식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번 기회에, 우리사회에서 학교교육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재 학교교육이 지식정보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빈곤을 양산하는 주범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는 지식정보사회로서 학교 밖 세계에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학교의 교과서적 지식은 과거의 낡은 지식이고, 심지어 틀린 지식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오직 대학입학만을 위해, 대학 입학 후나 졸업 후에도 별로 쓸모없는 교육을 위해 정부 예산 40조와 공교육비와 사교육비 각기 20조씩을 포함해서 가계부담 교육비 40조, 합해서 80조나 되는 돈을 쏟아 붓는 교육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검토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 없이 교육재정 확대만이 교육발전의 능사인 것처럼 주장해서도 안 된다.
특히 오늘의 학교교육은 300년 전, 산업사회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획일적인 교육방식과 학제이다. 따라서 이제는 지식정보사회의 중심 원리인 유비쿼터스 방식, 곧 언제 어디서나 새롭고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쉽고 빠르게, 그리고 무료 또는 값싸게 얻을 수 있고, 반면에 자신의 창의적 지식과 정보도 쉽고 빠르게 알릴 수 있는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창안해야 한다. 이미 우리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유비쿼터스 전자정부로 전환했다.
또한 오늘의 어린이와 청소년은 300년전, 100년전의 지적, 사회적 발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빠르게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낮추어야 하고 학제도 줄여야 한다. 학생들을 학교 안에 오래있게 하는 것보다 사회에서 일하며 배우도록 해야 한다.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평생학습을 하는 새로운 네트워크 학습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박정희의 군사독재 개발은 빈민을 정책적으로 양산했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복지를 인권, 시민권, 사회권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편협하고 차별적인 자선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빈곤의 사회구조적 원인은 감추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데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원인도 있지만, 박정희군사정권이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탄압하고, 독재개발의 정당성을 위해 빈곤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렸기 때문이다. 보수 정권 및 보수 세력들은 박정희군사정권 때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독재개발은 결코 정상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기반을 이루어놓은 것이 아니다.
서구의 산업화는 산업기술 발전에 의한 산업혁명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의 산업화도 산업기술 집약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독재개발 정책은 산업기술 집약이 아니라 단순노동 집약에 의한 임가공 포장수출 중심의 경제였다. 일본과 외국에 막대한 산업기술 로얄티를 지불하면서도 산업기술 개발은 하지 않고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에 의존하는 임가공중심의 수출경제에만 주력했다. 이것은 산업화가 아니라 상업화이다. 산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으로 장사를 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성장은 산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잉여임금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불의한 독재개발이 30여 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정상적인 산업화인 것처럼 경제 체제가 굳어졌다. 이 결과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지금도 산업기술은 거의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하는 속빈강정, 사상누각의 경제가 되었다. 특히 군사정권의 독재개발은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정책으로 저임금노동자를 양산했다. 저임금노동자의 생계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을 피폐하게 했다. 결국 농민은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과 대도시로, 공업단지로 이주해서 저임금노동자가 되었다.
군사정권은 이렇게 국가정책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빈민계급으로 만들고 이들의 정당한 권리와 분배요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파이가 커야 나누어 먹을 것도 있다'는 소위 거짓된 '파이 이론'으로 저임금노동자를 독재체제에 순응시키고, 국민을 현혹시켰다. 이로 인해 우리사회에 저임금노동자를 재생산하는 하층계급 게토가 형성되었다. 이 빈민게토는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지적, 문화적, 사회적, 심리적 차원에서 빈곤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못난 탓의 체념적 인생을 살게 했다. 그런데 군사정권은 이런 빈민게토가 일시적으로는 자기들에게 유리 할지 몰라도 국가 경제사회 발전에 얼마나 큰 문제가 되는지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최근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발전을 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 빈민게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이를 위한 3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에 군사독재정권은 국민경제보다 정권유지 차원에서 소수 재벌기업을 급조했다. 재벌기업은 세계경제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이 안 되어 그냥 chaebol이라고 표기했다. 이 재벌기업들은 권력의 비호아래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경제성장이란 이들만의 성장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군사정권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빈민은 결코 더불어 살 수 없는 무가치한 2류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세계경제전문가들이 분석한 것처럼, 군사독재개발과 재벌, 대기업, 부자들의 공로가 아니다. IMF외환위기 이후, 특히 민주적인 경제체질 개선과 IT산업기술 개발에 의한 것이다. 이들이 이룩했다고 자랑했던 경제는 국가부도사태 위기로 모두 무너졌다. 외환위기 사태는 불의한 정경유착의 사상누각 경제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IMF외환위기 때 정부로부터 막대한 국민 세금을 지원받고 회생한 재벌과 대기업들이 지금 또다시 정경유착하여 문어발식으로 중소기업들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고 있다. 또한 소상공인들이 장사해서 겨우 먹고 사는 동네에까지 대형마켓을 마구잡이로 세워서 이들의 생존권을 빼앗고 있다. 이렇게 중소기업인들과 소상공인들이 정당하게 자립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빼앗고, 빈민으로 전락시키고도 적반하장으로, 이것은 이들의 무능과 게으른 탓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결코 자유민주주의의 시장원리가 아니다. 정부가 재벌, 대기업, 부자들과 한패가 되어 탐욕적인 천민자본주의를 마치 자유민주주의 정책인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이들은 산업화 세력이 아니라 장사꾼 패거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사회에서 빈곤 발생의 주된 원인은 개인의 무능과 부도덕이 아니라 불의하고 부도덕한 정책과 사회구조에 있다. 보수정권과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원하는 쥐꼬리만한 복지를 가지고 도덕적 해이 운운하지만 자기들은 정부로부터 수천, 수만 배 이상 부당한 경제적 이익과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다. 실제로 우리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보다 보수정권과 부자들이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자행하는 온갖 불법, 탈법, 부도덕, 부정의가 더 큰 병폐가 되고 있다.
특히 보수정권과 부자들은 이렇게 자기들이 빈민을 의도적으로 양산하고도 빈민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력을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는 국가복지나 보편적 복지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마치 인도주의자인 것처럼 생색내고, 권력유지 차원에서 최소한의 복지를 차별지원하면서도, 빈민들은 '우리'와 동급이 아닌 2류적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은 차별이나 불평등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부자들과 보수정권은 빈민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 수 없는 '그들'로 분리하는 차별정책을 하고 있다. 인간사회에서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는 분리주의는 가장 나쁜 범죄적 차별이다.
한편, 보수정권과 부자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부자와 재벌을 미워하고, 반부자, 반기업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계층 간에 갈등이 증가되고 경제성장도 제대로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재벌과 부자들 중에 정당하게 돈을 번 기업주나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를 반문하면 제대로 대답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본인들인 것이다. 실제로 현 정권에서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이 인사청문회나 인사검증을 할 때마다 거의 한사람도 예외 없이 탈세와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등 불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출세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은 공직자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처벌을 받아야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청문회를 통과하기 위해 겉으로는 '반성한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것은 능력이고, 이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무능력한 사람들이라고 항변했을 것이다. 따라서 보수정권과 부자들이 권력과 부에 대한 법적,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한 반재벌기업, 반부자에 대한 사회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경제성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람답게 사는 공동체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최근 시카고대학 교수인 라구람 라잔(Raghuram Govind Rajan)의 '폴트 라인'(fault line)이란 책이 미국의 금융위기에 대한 탁월한 분석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미국의 금융위기는 표면적으로는 월가의 탐욕과 정부의 방만한 신용대출(서브 프라임 모기지)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단층선 밑을 보면 서서히 진행된 소득불균형 심화와 사회안전망 약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했다. 사실 이미 세계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병폐를 극복하는 길은 인간의 얼굴이 있는 시장경제, 따듯한 시장경제와 국가복지의 확대를 말해왔다.
우리사회는 미국보다 소득 불균형이 더 심하고, 사회안전망도 더 허약하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소득불균형 해소를 통해 빈부격차를 줄이고, 사회안전망도 더 강화하는 차별 없는 보편적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이제는 복지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반복지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복지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좌파적 주장이 아니라 우파도 인정하는, 이미 세계적 현실이다. 보수 세력과 보수 언론은 복지 병 운운하며 마치 선진국들이 복지를 축소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보편적 국가복지를 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침소봉대하는 것이다. 도리어 선진국들은 세계적 경제위기 상황에서 복지를 질적으로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국민을 현혹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보수 언론을 통해 거짓을 선전해도 국민은 더 진실된 정보를 다양한 통신매체를 통해, 또한 외국에서의 생활과 여행 경험 등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에 합당한 품격이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하고, 나라의 국격도 높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군사독재개발 이후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렇게 경제가 최우선의 가치가 되면서 사람을 위해 경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사회, 경제가 목적이고 사람이 수단이 되는 가치 전도의 사회가 되었다. 또한 '목적이 선하면 수단도 선하다'는 논리로 부의 축적과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의하고 부정한 경쟁사회가 되었다.
선진 경제에서는 물질자본 보다 사회적 자본, 곧 사회의식과 사회적 배려, 법과 질서, 도덕과 정의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세계 유력 언론이 부끄럽게도 '한국은 도덕보다 경제를 택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람됨의 도덕도 잃어버렸고 경제도 잃어버리고 있다. 우리사회에서도 도덕과 정의가 없으면 경제성장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사회에서 도덕과 정의 그리고 공동체 가치의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따라서 도덕과 정의 그리고 공동체 가치에 근거한 국가 사회정책의 보편적 복지도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료, 교육, 주택에 대한 사회적 공유 가치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모든 국가 정책이 다 그렇지만, 외국의 복지제도는 각기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전통 그리고 경제와 사회적 발전의 역사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복지정책을 추진할 때는 이런 요인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려는 사람들은 좋은 것만 보려고 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제점만 보아서는 해결의 길이 없다. 그리고 복지정책에서 중요한 것이 국민의식과 전달체계이다. 무엇보다 복지는 '공짜'라는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복지는 결코 '공짜'가 아니라 '돈과 도덕을 합한 가장 값비싼 것'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복지정책이 아무리 좋고, 재정이 풍부해도 전달체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복지가 부정의 온상이 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사회에 '복지재벌'이 있고, 복지로 '그냥 먹고 노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공짜' 의식과 전달체계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복지에서 전달체계는 사람의 핏줄과 같다. 보편적 국가복지의 필수 조건이 맞춤형 전달체계 구축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복지의 관건은 돈이 아니라 더불어 평등하게 살려는 마음, 도덕과 정의에 있다. 사람됨의 가치의식을 회복하고 공유하면 복지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국가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모든 국민이 행복한 삶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복지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무엇보다도 무상급식 문제이다. 가정 경제의 조건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에게 무상으로 급식을 해야 한다는 보편적 복지가 진보진영의 주장이고,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에게만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선별적 복지가 보수진영의 주장이다. 보수진영은 부유한 가정의 학생들은 돈을 낼 수 있고 국가 재정도 어려운데 굳이 무상급식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만한 재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진보진영의 무상급식 주장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복지정책에서 재정이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지정책의 근본 목적에 대한 인식이다. 복지정책의 목적은 무엇보다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의 존재의 존재인데, 이 사회적 관계를 지배관계로 인식하는가, 아니면 천부적 인권, 도덕과 자유와 정의의 관계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복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또한 복지는 빈곤의 발생 원인이 개인에게 있느냐,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있느냐 하는 문제인식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복지정책의 목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국가예산 편성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재정 문제보다 복지에 대한 목적의식과 철학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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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의무이자 국민의 권리
국가의 근본 목적은 모든 국민의 평등한 사회적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는데 있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 복지정책은 근본적으로 자선이 아니라 인권, 시민권, 사회권에 근거한다. 자선은 개인적 행위이지 국가의 정책이 될 수 없다. 유럽의 국가들은 인권, 시민권, 사회권에 근거해서 모든 사회정책을 추진하기 때문에 별도의 분야별 복지정책이 없고 모든 사회정책이 곧 복지이다. 반면, 미국은 복지를 국가의 의무로 인식하지만,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복지를 사회정책의 한 분야로 인식한다. 이렇게 유럽의 국가들과 미국의 복지정책이 다른 것은 두 나라들의 이념체제와 빈곤의 원인에 대한 문제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이념체제 측면에서 보면, 유럽의 국가들과 미국은 모두 자본주의 국가이지만, 유럽의 국가들은 사회민주주의 이념체제이고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체제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개인 소유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평등차원에서 사회적 공유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국가들은 사회적 평등의 기초가 되는 교육, 의료, 주택을 사적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공유로 인식한다. 교육과 의료는 평생 국가가 무료로 제공하고 주택은 공공 임대주택을 통해 주거안정을 보장한다. 유럽나라의 국민들 대다수는 정부의 공공임대주택에서 생활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 소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체제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이 사회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심하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개인의 소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사회적 불평등 문제는 소득보장 차원의 복지정책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빈곤의 원인에 대한 인식 측면에서, 유럽 국가들은 빈곤의 원인은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불평등한 사회구조적 요인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빈곤의 주된 원인이 되는 교육, 의료, 주택을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보장해서 빈곤을 사전에 예방한다. 미국은 빈곤의 원인이 개인의 책임에 있다고 인식한다. 빈곤에 대한 책임은 개인이 일차적으로 져야 하고, 그 다음에 국가의 복지정책으로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따라서 미국은 유럽 국가들처럼 빈곤을 사전에 예방하는 사회정책이 아니라 빈곤발생 사후에 소득보장 조치로서 별도의 복지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이런 결과로, 미국은 유럽의 국가들 보다 소득격차가 더 크고, 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화되어 있고, 빈곤계층이 더 많다.
선별이냐, 보편이냐가 아니라 차별이냐, 평등이냐가 문제다.
오늘의 국가 복지정책은 유럽은 물론 미국, 심지어 우리나라도 빈민들의 기초생계와 소득보장 차원을 넘어 모든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행복 추구라는 사회문화정책 차원에서 광의적으로 보편적 복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이렇게 국가가 광의적 차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정책은 간과하고, 복지를 빈민문제에만 국한시켜 선별이냐, 보편이냐 하는 논쟁을 하는 것은 복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되지 못한다.
국가가 지원하는 국민의 주거생활 안정과 편리 및 주변 환경개선과 교육과 문화예술기반시설 사업 등은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사회정책으로서의 보편적 복지이다. 특히 상하수도, 전기, 통신, 가정용 에너지, 도로와 가로등 및 가로수 등, 그리고 학교와 문화예술 시설은 가장 기본적인 보편적 국민복지에 해당된다. 물론 이런 기반 시설들을 사용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국민 각자가 지불한다. 그러나 이런 기반시설들을 만드는 비용은 정부가 세금으로 충당한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기반시설들이 보편적 국민복지인데도 불구하고 부자들이 사는 지역과 빈민과 서민들이 사는 지역을 차별한다. 빈민과 서민들이 생활하는 지역에는 아직도 상하수도와 전기 및 통신 설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난방용 도시가스는 더 비싸고 심지어 공급되지 않는 지역도 많다. 또한 도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가로등과 가로수가 없는 곳도 많다. 학교시설도 낙후되어 있고, 문화예술시설도 이들 지역에는 거의 없다.
특히 재개발 및 뉴타운, 한강 르네상스 및 디자인 서울, 자전거 도로 등의 프로젝트 사업은 국가의 발전과 국민 삶의 질적 향상이란 보편적 복지 명분을 가지고 추진되는데, 이런 모든 사업들에서 빈민과 서민은 도리어 억울하게 살던 곳에서 쫓겨나서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자들은 더 많은 개발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디자이너가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에 대해 '서민생활을 포함하지 않고 배제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도시 디자인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다'라고 했다.
더욱이 정부는 낙후지역을 발전시킨다는 보편적 국가복지 명분으로 전 국토를 개발, 재개발 하면서 300조가 넘는 선심성 난개발로 금수강산과 전통마을, 그리고 그곳의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고 일률적인 시멘트 공화국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낙후지역 개발 사업은 그곳에 살고 있는 서민과 빈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내쫒고 그곳을 부자들 차지와 유락시설로 만들고 있다. 특히 이 개발과정에서의 이익은 모두 부자들과 특정 개발 업체의 몫이 되고, 손해가 나면 국민 세금으로 충당한다.
이렇게 부자들은 국가 사회정책만이 아니라 국가의 갖가지 정책을 통해서 이미 학교 무상급식 '공짜' 문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국가의 보편적 복지 특혜를 받고 있다. 실제로 모 재벌그룹 회장 손자에게 왜 '공짜'로 밥을 주려고 하느냐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다. 이 손자는 이미 '공짜' 밥 한 그릇이 문제가 아니라 이 보다 수 천억, 아니 그 이상으로 국가의 특혜를 받고 있다. 헌법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재벌회장 손자와 빈민의 손자는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재벌회장 손자는 재벌 가문에서 태어난 특혜만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정당하지 않은 유산을 정부가 정당한 것처럼 물려주도록 특혜를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불평등하고 불의한 정부 특혜는 이 손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재벌과 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따라서 이제 복지문제의 초점은 선별이냐, 보편이냐가 아니라 차별이야 평등이냐가 되어야 한다.
의무교육에서 학교급식은 국가의 의무이다
다음으로 학교급식 문제인데, 학교급식은 복지 차원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교육, 특히 의무교육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학교급식의 근본 목적은 부자부모들에게 점심 도시락 준비로부터 자유를 주기위한 정책도,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에게 점심 한 끼 무료로 주려고 하는 복지제도도 아니다.
학교급식은 의무교육의 필수적 요소로서, 의무교육에서 학교급식 제공은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이다. 국가가 의무교육 제도를 헌법으로 제정한 것은, 모든 국민에게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중등교육을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고, 동시에 국가발전을 위해서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중등교육까지 받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은 누구나 싫든, 좋든 이 의무교육을 받아야 한다. 받지 않으면 처벌받게 되어있다. 따라서 국가는 이 의무교육 기간에 당연히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 의무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에 온 학생들에게 점심을 주지 않는 것은 무상의무교육의 헌법정신과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그동안 학교급식을 의무적으로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점심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정상이고 의무급식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의무교육에서 학교급식의 근본목적은 3가지이다. 첫째는, 국민건강이다. 국가는 국민 건강을 위해 빈부의 차이를 넘어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의무교육기간 동안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국민 건강과 체력을 향상시켜, 국민이 행복하게 살고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또한 의무급식은 보건의료정책 차원에서 국민건강의료비를 절감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인성과 사회성 함양이다. 학교급식은 단순히 학교에서 밥만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에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하듯이, 친구, 선후배와 같이 한솥밥을 먹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성과 사회성이 함양되도록 하는 중요한 교육과정이다.
셋째, 학교급식은 협동, 단결, 사회통합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학교급식을 통해 빈부 차이를 넘어 서로 포용, 배려, 협동, 단결하는 학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통합, 국민통합에 필수적이다.
교육에는 '명시적인 교과과정'(manifested curriculum)과 '숨겨진 교과과정'(latent curriculum)이 있는데, 명시적인 것보다 숨겨진 교과과정이 인성과 사회성 형성에 더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학교급식은 가장 대표적인 숨겨진 교과과정이다.
따라서 학교급식은 이런 의무교육의 근본목적과 국가발전 차원에서 당연히 의무급식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번 기회에, 우리사회에서 학교교육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재 학교교육이 지식정보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빈곤을 양산하는 주범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는 지식정보사회로서 학교 밖 세계에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학교의 교과서적 지식은 과거의 낡은 지식이고, 심지어 틀린 지식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오직 대학입학만을 위해, 대학 입학 후나 졸업 후에도 별로 쓸모없는 교육을 위해 정부 예산 40조와 공교육비와 사교육비 각기 20조씩을 포함해서 가계부담 교육비 40조, 합해서 80조나 되는 돈을 쏟아 붓는 교육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검토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 없이 교육재정 확대만이 교육발전의 능사인 것처럼 주장해서도 안 된다.
특히 오늘의 학교교육은 300년 전, 산업사회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획일적인 교육방식과 학제이다. 따라서 이제는 지식정보사회의 중심 원리인 유비쿼터스 방식, 곧 언제 어디서나 새롭고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쉽고 빠르게, 그리고 무료 또는 값싸게 얻을 수 있고, 반면에 자신의 창의적 지식과 정보도 쉽고 빠르게 알릴 수 있는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창안해야 한다. 이미 우리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유비쿼터스 전자정부로 전환했다.
또한 오늘의 어린이와 청소년은 300년전, 100년전의 지적, 사회적 발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빠르게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낮추어야 하고 학제도 줄여야 한다. 학생들을 학교 안에 오래있게 하는 것보다 사회에서 일하며 배우도록 해야 한다.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평생학습을 하는 새로운 네트워크 학습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박정희의 군사독재 개발은 빈민을 정책적으로 양산했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복지를 인권, 시민권, 사회권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편협하고 차별적인 자선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빈곤의 사회구조적 원인은 감추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데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원인도 있지만, 박정희군사정권이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탄압하고, 독재개발의 정당성을 위해 빈곤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렸기 때문이다. 보수 정권 및 보수 세력들은 박정희군사정권 때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독재개발은 결코 정상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기반을 이루어놓은 것이 아니다.
서구의 산업화는 산업기술 발전에 의한 산업혁명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의 산업화도 산업기술 집약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독재개발 정책은 산업기술 집약이 아니라 단순노동 집약에 의한 임가공 포장수출 중심의 경제였다. 일본과 외국에 막대한 산업기술 로얄티를 지불하면서도 산업기술 개발은 하지 않고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에 의존하는 임가공중심의 수출경제에만 주력했다. 이것은 산업화가 아니라 상업화이다. 산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으로 장사를 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성장은 산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잉여임금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불의한 독재개발이 30여 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마치 정상적인 산업화인 것처럼 경제 체제가 굳어졌다. 이 결과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지금도 산업기술은 거의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하는 속빈강정, 사상누각의 경제가 되었다. 특히 군사정권의 독재개발은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정책으로 저임금노동자를 양산했다. 저임금노동자의 생계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을 피폐하게 했다. 결국 농민은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과 대도시로, 공업단지로 이주해서 저임금노동자가 되었다.
군사정권은 이렇게 국가정책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빈민계급으로 만들고 이들의 정당한 권리와 분배요구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파이가 커야 나누어 먹을 것도 있다'는 소위 거짓된 '파이 이론'으로 저임금노동자를 독재체제에 순응시키고, 국민을 현혹시켰다. 이로 인해 우리사회에 저임금노동자를 재생산하는 하층계급 게토가 형성되었다. 이 빈민게토는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지적, 문화적, 사회적, 심리적 차원에서 빈곤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못난 탓의 체념적 인생을 살게 했다. 그런데 군사정권은 이런 빈민게토가 일시적으로는 자기들에게 유리 할지 몰라도 국가 경제사회 발전에 얼마나 큰 문제가 되는지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최근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발전을 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 빈민게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이를 위한 3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에 군사독재정권은 국민경제보다 정권유지 차원에서 소수 재벌기업을 급조했다. 재벌기업은 세계경제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이 안 되어 그냥 chaebol이라고 표기했다. 이 재벌기업들은 권력의 비호아래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경제성장이란 이들만의 성장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군사정권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빈민은 결코 더불어 살 수 없는 무가치한 2류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세계경제전문가들이 분석한 것처럼, 군사독재개발과 재벌, 대기업, 부자들의 공로가 아니다. IMF외환위기 이후, 특히 민주적인 경제체질 개선과 IT산업기술 개발에 의한 것이다. 이들이 이룩했다고 자랑했던 경제는 국가부도사태 위기로 모두 무너졌다. 외환위기 사태는 불의한 정경유착의 사상누각 경제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IMF외환위기 때 정부로부터 막대한 국민 세금을 지원받고 회생한 재벌과 대기업들이 지금 또다시 정경유착하여 문어발식으로 중소기업들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고 있다. 또한 소상공인들이 장사해서 겨우 먹고 사는 동네에까지 대형마켓을 마구잡이로 세워서 이들의 생존권을 빼앗고 있다. 이렇게 중소기업인들과 소상공인들이 정당하게 자립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빼앗고, 빈민으로 전락시키고도 적반하장으로, 이것은 이들의 무능과 게으른 탓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결코 자유민주주의의 시장원리가 아니다. 정부가 재벌, 대기업, 부자들과 한패가 되어 탐욕적인 천민자본주의를 마치 자유민주주의 정책인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이들은 산업화 세력이 아니라 장사꾼 패거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사회에서 빈곤 발생의 주된 원인은 개인의 무능과 부도덕이 아니라 불의하고 부도덕한 정책과 사회구조에 있다. 보수정권과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원하는 쥐꼬리만한 복지를 가지고 도덕적 해이 운운하지만 자기들은 정부로부터 수천, 수만 배 이상 부당한 경제적 이익과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다. 실제로 우리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보다 보수정권과 부자들이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자행하는 온갖 불법, 탈법, 부도덕, 부정의가 더 큰 병폐가 되고 있다.
특히 보수정권과 부자들은 이렇게 자기들이 빈민을 의도적으로 양산하고도 빈민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력을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는 국가복지나 보편적 복지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마치 인도주의자인 것처럼 생색내고, 권력유지 차원에서 최소한의 복지를 차별지원하면서도, 빈민들은 '우리'와 동급이 아닌 2류적 인간이기 때문에 이것은 차별이나 불평등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부자들과 보수정권은 빈민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 수 없는 '그들'로 분리하는 차별정책을 하고 있다. 인간사회에서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는 분리주의는 가장 나쁜 범죄적 차별이다.
한편, 보수정권과 부자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부자와 재벌을 미워하고, 반부자, 반기업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계층 간에 갈등이 증가되고 경제성장도 제대로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재벌과 부자들 중에 정당하게 돈을 번 기업주나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를 반문하면 제대로 대답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본인들인 것이다. 실제로 현 정권에서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이 인사청문회나 인사검증을 할 때마다 거의 한사람도 예외 없이 탈세와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등 불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출세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은 공직자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처벌을 받아야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청문회를 통과하기 위해 겉으로는 '반성한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것은 능력이고, 이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무능력한 사람들이라고 항변했을 것이다. 따라서 보수정권과 부자들이 권력과 부에 대한 법적,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한 반재벌기업, 반부자에 대한 사회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경제성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람답게 사는 공동체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최근 시카고대학 교수인 라구람 라잔(Raghuram Govind Rajan)의 '폴트 라인'(fault line)이란 책이 미국의 금융위기에 대한 탁월한 분석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미국의 금융위기는 표면적으로는 월가의 탐욕과 정부의 방만한 신용대출(서브 프라임 모기지)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단층선 밑을 보면 서서히 진행된 소득불균형 심화와 사회안전망 약화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했다. 사실 이미 세계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병폐를 극복하는 길은 인간의 얼굴이 있는 시장경제, 따듯한 시장경제와 국가복지의 확대를 말해왔다.
우리사회는 미국보다 소득 불균형이 더 심하고, 사회안전망도 더 허약하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소득불균형 해소를 통해 빈부격차를 줄이고, 사회안전망도 더 강화하는 차별 없는 보편적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이제는 복지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반복지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복지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좌파적 주장이 아니라 우파도 인정하는, 이미 세계적 현실이다. 보수 세력과 보수 언론은 복지 병 운운하며 마치 선진국들이 복지를 축소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보편적 국가복지를 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침소봉대하는 것이다. 도리어 선진국들은 세계적 경제위기 상황에서 복지를 질적으로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국민을 현혹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보수 언론을 통해 거짓을 선전해도 국민은 더 진실된 정보를 다양한 통신매체를 통해, 또한 외국에서의 생활과 여행 경험 등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에 합당한 품격이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하고, 나라의 국격도 높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군사독재개발 이후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렇게 경제가 최우선의 가치가 되면서 사람을 위해 경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사회, 경제가 목적이고 사람이 수단이 되는 가치 전도의 사회가 되었다. 또한 '목적이 선하면 수단도 선하다'는 논리로 부의 축적과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의하고 부정한 경쟁사회가 되었다.
선진 경제에서는 물질자본 보다 사회적 자본, 곧 사회의식과 사회적 배려, 법과 질서, 도덕과 정의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세계 유력 언론이 부끄럽게도 '한국은 도덕보다 경제를 택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람됨의 도덕도 잃어버렸고 경제도 잃어버리고 있다. 우리사회에서도 도덕과 정의가 없으면 경제성장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사회에서 도덕과 정의 그리고 공동체 가치의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따라서 도덕과 정의 그리고 공동체 가치에 근거한 국가 사회정책의 보편적 복지도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료, 교육, 주택에 대한 사회적 공유 가치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모든 국가 정책이 다 그렇지만, 외국의 복지제도는 각기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전통 그리고 경제와 사회적 발전의 역사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복지정책을 추진할 때는 이런 요인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려는 사람들은 좋은 것만 보려고 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제점만 보아서는 해결의 길이 없다. 그리고 복지정책에서 중요한 것이 국민의식과 전달체계이다. 무엇보다 복지는 '공짜'라는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복지는 결코 '공짜'가 아니라 '돈과 도덕을 합한 가장 값비싼 것'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복지정책이 아무리 좋고, 재정이 풍부해도 전달체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복지가 부정의 온상이 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사회에 '복지재벌'이 있고, 복지로 '그냥 먹고 노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공짜' 의식과 전달체계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복지에서 전달체계는 사람의 핏줄과 같다. 보편적 국가복지의 필수 조건이 맞춤형 전달체계 구축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복지의 관건은 돈이 아니라 더불어 평등하게 살려는 마음, 도덕과 정의에 있다. 사람됨의 가치의식을 회복하고 공유하면 복지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국가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모든 국민이 행복한 삶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김성재 김대중도서관 관장, 연세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