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참좋다 12

#시린 겨울

#시린 겨울 -이원영 2023.01.24 정말 추운 겨울밤에 겨울은 역시 추워야 제맛이지 이런 호기를 부렸던 적이 있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얼음이 꽁꽁 얼고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겨울다운 겨울은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새벽부터 아궁이에 불을 때야 했던 시절 얼어붙은 개울물에서 빨래를 해야 했던 시절 겨우내 땔나무를 걱정해야 했던 시절 내가 어렸던 시절엔 발가락에 동상이 종종 걸려도 춥지 않았고 겨울도 역시 즐거운 놀이가 있는 계절이었다. 철들어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가난한 셋방살이를 전전할 때부터 겨울은 지독하게 더 추워졌다. 내복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겨울 찬바람이 무릎으로 도둑처럼 기어들어 오는 계절 두꺼운 이불을 깔고 덮어야 하고 보일러 외출과 온수를 매일 확인해야 하는 겨울은 반갑지 않은 감기몸살같..

시가참좋다 2023.01.24

꺾이지 않을 결심 / 김해자

꺾이지 않을 결심 / 김해자 보름여 영하 10도가 넘어가던 즈음, 털이 젖어 몸에 딱 달라붙은 깡마른 고양이가 빙판길을 올라갔다. 어디를 다쳤는지 걷는 것도 비칠비칠 부자연스러웠다. 눈더미 위에서 저를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양이가 뒤돌아봤다. 눈동자에도 생기가 없었다. 나무와 풀도 눈 뒤집어쓰고 찬바람 맞고 있는 지금은 혹한의 한복판, 러시아의 침공이 우끄라이나를 넘어 이 산골까지 들어와 있다. 나는 안다. 기름이 비싸서 스티로폼 매트를 여기저기 깔아놓고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는 이웃들을. 혈색 좋다고 하기엔 볼이 터질 것처럼 붉은 얼굴들을. 나는 본다.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쿠키를 포장하고, 박스를 접는 등 알바를 서너개씩 하며 이 겨울을 보내는 사람들을. ‘이대로 살 순 없지 않느냐’며 죽음을 생각..

시가참좋다 2023.01.07

#김혜자 #눈이부시게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 #힘냅시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김혜자 #수상소감 #백상예술대상 #눈이부시게

시가참좋다 2022.12.11

폐지의 꿈

나의시 85. 폐지의 꿈 저는 푸른 나무였어요 숲속에서 새들과 꽃들이 친구였어요 시원한 바람이 불면 살랑 춤 추는 그러다 도시에 왔지요 뜨거운 마음으로 하얀 종이가 되어 만나는 여러 친구들을 감싸주며 너무나 행복했지요 편안히 쉬고 있는데 어느날 할머니가 버려진 저를 실고서는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이야기해주셨지요 기다립니다 새로운 모습을 기대됩니다 보람찬 내 역할을 차분하게 그리고 희망차게 저는 아직도 꿈꾸는 나무랍니다 숲을 간직한 푸른 나무랍니다 #폐지 #나무 #희망 #나의시 #이원영

시가참좋다 2022.11.29

나의 꿈 /한용운

나의 꿈 한용운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당신의 책상 밑에서 "귀똘귀똘" 울겠습니다

시가참좋다 2022.11.19

#지리산처럼

지리산처럼 ​ 큰 산 품이 참 큰 산이 거기에 있었다 깊은 산 골이 참 깊은 산이 안아주었다 ​ 외로운 날들 두려운 날들 고달픈 날들 그 어두운 날들에 난 지리산에 무거운 어깨로 스며들었다 ​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단풍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봉우리들 품안에서 산이 내가 되고 내가 산이 되었다 어머니의 아들, 아들의 어머니처럼 아득하고 희미한, 세월에 켜켜이 겹쳐 그리움과 상처, 지워지지 않는 사랑처럼 ​ 떠나온 곳이 어디든 지나온 곳이 어디든 그곳에 가만히 있어준다는 건 기다려 조용히 맞아준다는 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지리산처럼 어머니처럼 #지리산

시가참좋다 2022.11.04

#회상

#회상 힘이 들 때마다 길어진 손톱을 깎는 습관처럼 과거의 즐거운 일들을 떠올린다.. 즐거운 일들이 떠오르기 어려울 때는 과거의 사진을 찾아본다. 과거는 지나간 일이고 결코, 다시는 못 올 일인데도 사진 속 희미한 풍경은 커다란 위안을 주는 별처럼 위대한 힘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슬픈 일보다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고 싶다 우리네 삶 자체가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가? 잊자고 하는데도 원하지 않는데도 아픈 기억은 돌에 새긴 글씨처럼 잘 지워지지 않고 그 속에 검은 이끼가 가득하다. 사진 속 나의 모습 과거의 누구 모습은 웃기도 하고 심각하기도 하고 순간일 뿐인데도 큰 기쁨을 머금고 숨 쉴 수 있는 샘물이 솟는다 아! 옛날이여 아! 어제 같은 옛날이여 지나간 일들이여 모래위에 발자국처럼 잊혀지고 잊혀지고 사..

시가참좋다 2022.07.29

#푸른 고래

푸른 고래 게슴츠런 눈으로 고래를 바라본다 포유류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왔다는데 왜 고래는 바다로 다시 돌아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푸른 바다에 푸른 고래는 없다고 어떤 이가 이야기했다 어떤 이는 더 이상 바다는 푸르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난 믿고 싶다 푸른 고래는 푸른 바다가 그리워 돌아갔다고 그리고 자유로운 바다 속에서 한 없이 넓고 시원한 바다에서 푸른 꿈을 꾸고 있다고 고래를 보면서 푸른 꿈을 꾸는 사람들 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하늘과 닿은 바다 그 푸른 경계에 고래는 살고 있다 (2022년 7월21일에)

시가참좋다 2022.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