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밭갈기

현기영 선생의 오, 구럼비

보리아빠 이원영 2012. 3. 8. 15:28

 제주 구럼비를 정말 사랑하는 문학인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는 글입니다.

 

 

[시론]오, 구럼비!
 

천혜의 명승지 강정마을. 지난 5년 동안 탈법·편법의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마을 전체가 농성장이 되다시피 하면서 호된 몸살을 앓아 온 강정에 지금 치명적 위기가 닥쳤다. 정부의 발파 명령에 따라 구럼비 해안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했다. 정부 자신이 설계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했고, 그에 따라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금년도 예산이 거의 전액 삭감되었는데도, 정부는 느닷없이 안면을 바꾸고 공사 착공을 밀어붙이는 자기모순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지난 5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경찰 400명을 포함한 600여명의 경찰이 구럼비 해안을 에워싸 외부와 고립시켜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상태에서 강정은 바야흐로 폭풍전야의 무서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28일째 옥중 단식 중인 영화평론가 양윤모씨는 죽기를 결심하고 물과 소금을 끊기 시작했다.

구럼비 해안 일대를 에워싼 높은 펜스(장벽)를 보면서, 그리고 육지 경찰대를 보면서 주민들은 64년 전의 4·3사건 악몽이 되살아나 몸서리친다. 외부 접근은 물론 시선까지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는 그 장벽은 4·3사건 당시 해상봉쇄령을 연상시키고, 육지 경찰대는 해상봉쇄령 속에 초토화의 대학살을 자행했던 토벌대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저 장벽 안에서 대학살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인명 학살이 아닌 다른 의미의 학살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전지역의 희귀종, 멸종위기종 생물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파괴될 것이다. 붉은발말똥게, 제주새뱅이, 기수갈고둥, 층층고랭이, 그리고 시냇물에 놀던 맹꽁이, 원앙새, 은어, 바닷속의 아름다운 산호 숲이 가차 없이 학살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조상 전래의 자기 땅에서 뿌리뽑힌 유배자가 되어 낯선 타관 땅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아니, 더 큰 문제는 구럼비 암반의 파괴 그 자체이다. 1.2㎞에 이르는 이 통바위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바위이다. 용암이 굳은 것이 아니라 지하의 진흙이 용솟음쳐 굳은 암반인데, 맨발로 걸어보면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매우 부드럽고 그 위에 누우면 몸을 감싸주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지는 기이한 암반이다.

그리고 이 바위 속에는 수맥이 혈맥처럼 수없이 뻗어 있어서 곳곳에 생수가 솟아나 바위 틈서리에 희귀종 식물들과 돌찔레 같은 아름다운 야생화를 피우고, 맑은 물웅덩이들에는 작은 수생식물과 동물들이 아름다운 작은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널따란 암반에는 신이 조각해 놓은 것처럼, 인간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추상화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래서 그 거대한 암반은 무생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영혼이 있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태초 이래 인간을 비롯한 온갖 생물들의 존재 기반이었던 저 성스럽고 아름다운 암반이 이제 순식간에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다. 구럼비 바위가 지켜온 수천년, 수만년이라는 막대한 시간이 한순간의 거품에 불과한 한 정권에 의해서 무참하게 파괴되려고 한다. 지금 강정에서 천년의 공동체가 무너지려고 한다. 인간생태계와 더불어 생물생태계가 허물어지려고 한다.

   
▲ 현기영 소설가

4·3의 참극을 세계평화의 이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정부가 그 섬에 전쟁의 전초인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고 논리의 파탄이다. 전쟁과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쟁과 폭력으로 이룩되는 평화는 어디에도 없다. 평화는 평화가 낳는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파괴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구럼비를 물려주기를 소망한다. /현기영(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