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훈습-화상경마장과 싸우는 이유 / 김율옥
한겨레 등록 : 2014.12.31. 18:48 <1월1일자 신문 보도>
‘훈습’(薰習)의 사전적 의미는 향이 그 냄새를 옷에 배게 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훈습은 우리가 행하는 선악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어떤 인상이나 힘을 마음속에 남김을 이르는 말이다. 마치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배어나오지만,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교실에서 마주 보이는 학교 앞 235m에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화상경마도박장이 들어섰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건물이 세워지는 동안 그 건물 옆을 지나다니면서도 그 건물이 화상경마도박장인 줄은 몰랐다. 건물이 완공되고서도 그곳에는 화상경마도박장이라는 표시를 어느 곳에도 하지 않았다. 학교보건법이 정하는 200m에서 35m가 떨어졌다고 합법(?)이라고 했다.
2013년 5월에야 25층의 그 건물 전체가 화상경마도박장으로 운영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건물 주위에 살면서, 또 그 주위로 오고 가면서 미래를 위한 꿈을 꾸고 배우며 살아가는 아이들 걱정이 앞섰다. 학교로부터 시작하여 학부모, 교사, 지역주민들이 대책위를 구성하고 화상경마도박장 추방을 위해 600일이 넘도록 싸우는 중이다.
최근 마사회는 화상경마도박장의 이름을 감춘 ‘렛츠런(Lets Run) CCC’라는 문화공감센터의 홍보물을 여러 지역에 나누어주었다. 화상경마도박장이 열리지 않는 월~목요일에 주민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 주민들의 삶의 자리 가까운 곳에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지역 상생을 말하는 렛츠런 문화공감센터의 무료 강좌들은 죽음의 냄새를 숨기려는 화려한 화장이며 껍질이다. 금, 토, 일요일의 화상경마도박장 운영을 문화공감센터 이름으로 포장하여, 지역주민들을 화상경마도박장으로 끌어들이는 미끼이며 유인책이다. 마치 회칠한 무덤처럼, 썩은 생선을 멋진 포장에 담으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화상경마도박장이 갖는 죽음의 기운은 서울의 10개, 전국의 30개 화상경마도박장 주위의 풍경이 그 속내를 확연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화상경마도박장이 위치한 지역의 학급당 학생수가 줄어드는 마을, 건전한 지역상권이 사라지는 동네, 주변에 유해업소가 더 많이 들어서는 거리, 주차 혼란과 길거리 음주와 흡연으로 마음 놓고 지나다니기 꺼려지는 골목들….
이 땅의 미래인 우리 아이들을 유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고 향기로운 환경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다. 학교보건법이 정하는 기준은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고 놓치지 않겠다는 어른들의 약속이며 다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마주한 상대가 골리앗처럼 거대한 공기업이고, 우리가 지닌 것은 12척의 배에 불과해도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소득을 얻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의 생명에 담긴 향기와 생기가 훼손되지 않도록, 안심하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건강한 교육환경을 마련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을 둘러싼 자리가 배금주의에 기초한 한탕주의나 죽음의 문화로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여름의 폭염과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는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라도 아이들의 자리를 지켜주는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고 싶기 때문이다.
김율옥 성심여고 교장·성심수녀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