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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쿠바 -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찾아

보리아빠 이원영 2008. 7. 8. 12:16
모두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나라
  특집2> 쿠바기행단 보고
  글❚김민자 구미 천생초등학교 교사 / 사진❚월간 <노동세상>

 
신자유주의 대안 찾아 쿠바로
 
몇 해 전 우연히 쿠바의 생태농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국가의 전적인 지원 아래 도시생태농업이 실시되고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쿠바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
한미 FTA 투쟁이 한창일 때, 한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신자유주의가 아니면 대안은 있어요?” ‘과연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대안이란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면서 남미의 작은 나라 쿠바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갔다.
각종 영상과 책을 통해 쿠바에 점점 매료되었고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노동세상에서 ‘쿠바기행단’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주변의 적극적인 권유와 나태한 내 삶에 변화를 주고 싶어 쿠바 기행을 결심했다.
호세마르티 기념탑에서 내려다 본 아바나 시내. 오른쪽 아래 체 게바라의 철제 조형물이 있는
곳이 쿠바 내무부 건물이다.

쿠바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인천공항에서 캐나다 밴쿠버까지 11시간 30분, 밴쿠버에서 토론토까지 4시간, 토론토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아바나까지 3시간 30분을 가야만 했다. 공항에서 버스로 30분을 가서야 우리는 쿠바공화국의 수도 아바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쿠바에서의 첫 날
� 호세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한 쿠바기행단.
호세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한 쿠바기행단.
쿠바 내무부 소속 국영여행사인 ‘쿠세코’의 가이드 펠리페 이슬라씨(앞쪽 제일 왼쪽)
 
 
아바나에서 처음 본 것은 과거의 호화로움과 현재의 가난함을 동시에 간직한 구 아바나의 건물들과 도시 곳곳에 세워진 동상들이었다. 우리가 처음 묵게 된 호텔을 포함해 구 아바나의 건물들은 대부분 스페인 식민지 시절 세워진 고풍스러운 건물들로 과거 식민지 지배자들의 사치스러움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녹슨 창틀과 허물어진 난간은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의 어려움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50여년에 걸친 미국의 경제봉쇄와 소련의 붕괴가 가져온 결과다. 구 아바나의 건물을 통해 쿠바의 슬픈 역사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호텔에 짐을 풀고 아바나 시내를 차로 한 바퀴 돌았다. 존 레논 동상이 세워진 평화 공원과 쿠바의 독립영웅 호세마르티가 내려다보고 있는 혁명광장에 들러 해맑은 아이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저녁에는 구 시가지를 구경하고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던 바에서 그가 자주 마셨다던 ‘다이끼리’를 한 잔씩 마시며 쿠바 음악을 감상했다. 쿠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악과 춤이다. 어딜 가나 라이브 공연이 펼쳐지고 즉석 댄스파티가 열린다. 쿠바인들은 지구 반대편의 낯선 이방인들을 거리낌 없이 맞아주었다. 사진도 잘 찍어주고 대화에도 잘 응했다. 쿠바 시내를 돌면서 서로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눈빛과 몸짓으로 마음을 나눈다.

아바나 구시가지의 건물들은 수백 년 전 스페인 시절에 지어진 것들로, 낡았지만 화려한 기품
을 간직하고 있다. 구 아바나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0km가 넘는 말레콘 방파제는 아바마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이다. 말레콘 방파제에서는 학교
를 마친 아이들,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 산보하는 시민들로 북적인다.
 
생태농업으로 위기를 극복하다
카피톨리오는 바티스타 정권 시절 미국 워싱턴의 국회의사당과 똑같은 모양이다. 백악관을 지
은 건설업체가 와서 세운 것으로 혁명 이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현재는 환경
부, 과학기술부 등 정부 부처 건물로 사용 중이다.
아바나에서 하루를 묵은 우리는 미국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을 쏙 빼닮은 카피톨리오를 잠시 견학하고 바라데로로 향했다.
이번 쿠바 기행에서 빼먹을 수 없는 재미가 우리의 가이드인 펠리페 선생님에게서 듣는 쿠바 이야기다. 바라데로로 가는 길에 우리는 쿠바의 경제적 어려움과 일요일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관하여 들을 수 있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쿠바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나라였다.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은 쿠바가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을 실현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소련의 지원은 쿠바에게는 행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미국의 봉쇄 속에 소련의 지원은 참으로 절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지원에 안주했던 쿠바는 사탕수수에 의존한 불균형하고 왜곡된 경제구조(스페인과 미국에 의해 강요됐다)를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소련의 급작스런 붕괴는 쿠바에 커다란 어려움을 안기게 되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식량난이었다.
“쌀은 이미 바닥났고 콩은 50퍼센트, 식물성 기름은 16퍼센트, 라드는 7퍼센트, 연유는 11퍼센트, 버너는 47퍼센트, 분유는 22퍼센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피델 카스트로, 1991년 제4회 공산당 대회 연설)

쿠바는 이 위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극복해가고 있다. 도시생태농업으로 식량난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관광산업 육성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도시생태농업은 이제까지 자연을 병들게 했던 자본주의 농업방식을 극복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세계 각국에서 쿠바의 도시생태농업을 배우기 위해 견학을 오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불균형한 농업구조로 말미암아 채소, 과일류를 제외한 식량의 많은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관광으로 벌어들인 외화를 식량 수입에 사용함으로써 다른 물자의 수입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쿠바에서 당장 필요한 주택과 자동차의 공급도 차질을 빚고 있다. 식량 자급률이 낮은 이유는 여전히 많은 농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농지의 50%만 경작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쿠바도 도시 집중 현상이 두드러져 농업인구의 부족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연대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쿠바
펠리페 선생님의 이야기 중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쿠바의 연대성 정책과 국민들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이다. 베네수엘라의 무상의료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2만 명의 의사를 파견했다. 펠리페 씨는 베네수엘라 같은 친구 나라를 도와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친미 반동’ 국가인 파키스탄에까지 3,000여 명의 의사를 파견한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했다. 10여 년 전에 중국과 경제협정을 맺으면서 중국산 컬러TV ‘판다’를 싼 값에 들어오기로 했는데 그 중 상당수를 베네수엘라로 보냈다는 이야기 등 쿠바의 연대 정책에 대한 펠리페 씨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연대성 원칙은 올바르고 지켜져야 하지만, 쿠바 국내의 경제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대치상태에서 50년간 허리띠를 졸라매 온 쿠바 국민들에게 더 참으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자신처럼 죽을 때까지 카스트로를 지지할 사람들도 많지만, 특히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은 유럽은 물론 미국의 영화, 잡지, TV 등을 자유롭게 접하면서 변화와 외부 환경에 민감하다고 한다.
최근 대규모 유전이 발견될 가능성이 커져 에너지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도 “우리 피델이 또 석유가 나지 않는 가난한 나라들에게 나눠줄 것”이라는 펠리페의 불만 섞인 농담 속에서 피델에 대한 존중과 쿠바의 연대성 원칙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나왔다.
펠리페 말에 의하면 지금 쿠바는 정말 중요한 시기이고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한다. 사회 전반에 남아있는 비효율적인 부분들이 수정되고 인민의 창의성과 자발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새로운 모습을 갖출 것이란다. 수긍이 가면서도 우려되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쿠바가 갖고 있던 원칙들(평등과 연대가 최우선 이던 나라, 물질이 아닌 인간이 우위에 서는 나라)이 옳게 지켜지길 빌어 본다.
 
쿠바는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트랙터를 놓고 대신 소를 농사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바나를 벗
어나자마자 들판을 거닐고 있는 소들을 찾을 수 있었다.
창밖에 펼쳐진 장면은 장관이다. 넓은 초원에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라니. 쿠바에서는 가축을 키울 때 방목이 원칙이다. 쿠바 대부분의 땅이 산호바위로 덮혀 있어 농지로 이용할 수가 없다. 쿠바정부는 이곳을 초지로 만들어 소를 키운다. 육류 섭취를 늘리고 아이들에게 공급할 신선한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쿠바의 시골 어디를 가든 넓은 들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각종 가축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염소, 말, 소, 닭 심지어 돼지도 우리에서 자라지 않는다.
바라데로로 가는 길에 ‘허쉬’ 기차를 탔다.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시절, 초콜릿으로 유명한 ‘허쉬’사의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고 회장이 그 곳을 오갈 때 사용하던 회장 전용 기차였다고 한다. 기차에 오르면 우선 라틴 음악을 라이브로 듣게 된다. 그리고 의자에 앉을 사이도 없이 음악에 맞춰 라틴 댄스를 춰야 한다. 절대로 가만히 앉아 감상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쿠바식인 셈이다.
세 시간 가량 걸려 우리가 도착한 바라데로는 관광산업을 위해 깨끗하게 단장된 해변도시이다. 아바나와 달리 세련되고 깨끗한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 잘 닦여진 거리며 넓은 골프장, 예쁜 해변, 잘 단장된 도시의 모습이 세계적인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틀을 묵어야 한다. 우리가 방문할 기관들이 토요일, 일요일은 모두 쉬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을 직접 만나기 어려운 호화로운 이곳보다 아바나에서 묵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호텔에 짐을 풀고 바라데로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특히 인상에 남은 곳이 뒤퐁회장의 별장이다. 식민지 시절 미국의 화학기업 뒤퐁사의 회장은 바라데로의 남쪽 해변과 북쪽 해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에 별장을 짓고 온갖 호사를 누렸다. 별장 안에는 개인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되어 있다. 물론 혁명 이후에는 이곳을 식당으로 개조해 관광 명소로 이용하고 있다. 뒤퐁 별장에서 바라본 카리브 해는 정말 장관이었다.
 
쿠바와 한국. 언어를 넘어 ‘교육’으로 ‘통’하다!
바라데로에서 둘째 날. 아침부터 날이 흐리다. 푸른 카리브 해를 즐기려던 마음을 접고 스쿠터를 빌려 타고 바라데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스쿠터를 자신 있게 운전하는 사람이 없어 대여에 실패했지만 스쿠터를 대여하는 라몬과의 즐거운 만남이 그나마 아쉬움을 덜어주었다. 표정이 풍부하고 장난기 많은 라몬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남과 북의 분단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이 물러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함께 사진도 찍고 동전 수집을 한다는 그의 딸을 위해 우리나라 동전을 선물로 주었다.
오후에는 바라데로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에 갔다. 우선 벼룩시장에 들러 각종 기념품을 샀다. 그곳에서 우연히 라틴 댄스를 추고 있는 소녀들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초등학교가 있다 해서 물어물어 찾아 간 그 곳에는 마침 선거일이라 선생님들이 몇 분 계셨다. 낯선 이들을 경계하지 않고 쉽게 마음을 여는 것은 쿠바인들의 천성일까. 선생님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학교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작고 낡았지만 아담하고 예쁜 교실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각종 게시물과 구호들. 유치원을 포함해 21학급인 이 학교는 한 학급당 학생수가 16~20명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한 교실에서 30~40명이 공부를 한다하니 놀란다. 20여 년을 근무한 50대 선생님과 10여 년을 근무한 두 여선생님의 인상이 너무 좋아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물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지만 두 분 선생님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교문을 나섰다.
바라데로의 초등학교. 작고 아담한 학교 건물은 낡았지만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정성이 묻어난다.
 
알수록 친근해지는 나라, 쿠바
아침부터 오기 시작한 비 때문에 상가에 들러 여러 가지 기념품을 구경했다. 호텔과 상점은 외국기업과 쿠바 정부가 함께 운영한다고 한다. 외국 투자기업들의 횡포를 사전에 막기 위한 정책이다. 오후가 되어서야 우리는 다시 아바나로 올 수 있었다.
바라데로에서 아바나로 오는 길에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과 ‘노인과 바다’의 영감을 얻었다는 코히말을 구경했다. 헤밍웨이의 집 또한 뒤퐁 회장의 집만큼 화려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동물들의 박제가 걸려 있었고 서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넷째 부인이 선물한 3층짜리 건물의 일층에는 고양이 50여 마리가 살았던 큰 방이 있었고 개인 수영장과 보트, 심지어 헤밍웨이가 키웠던 개의 무덤도 있었다. 헤밍웨이가 좌파였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없다. 누릴 수 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던 헤밍웨이도 말년에는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다 자살한다. 과도한 음주가 우울증의 원인이었다나. 펠리페의 재치 있는 한마디가 이어진다.
“해 볼 것 다 해보고 더 이상 할 게 없어 자살한 게 아닌지. 가난한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릴 시간도 없죠. 사는 게 바쁜데.”
헤밍웨이가 자주 들러 ‘노인과 바다’를 구상했고,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 코히말 해변.
차에 오르면 우린 끊임없이 펠리페에게 질문을 하고 펠리페는 막힘없이 답변을 한다. 쿠바 교육에 대한 이야기, 주택 문제, 심지어 범죄에 대한 질문까지. 쿠바 사회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다.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신선함과 사회주의 국가로서 갖는 특별한 정책들이 귀를 솔깃하게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모든 인민이 무상으로 치료받는 것!”
이제부터 본격적인 기행이다. 첫 방문지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이다.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에서 우리를 맞아주신 분은 편안하고 맘 좋게 생기신 대외협력 담당 부총장 ‘빅토르(승리)’ 씨다. 그에게 학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1998년 중남미 지역에 허리케인이 휩쓸고 갔을 때 쿠바는 의료봉사단을 파견했다. 이때부터 카스트로는 가난한 나라의 의사양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의 설립을 구상하게 된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해군사관학교를 개조한 것으로 개교 이래 3번에 걸쳐 30여개 나라 4,500여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교 면적은 100만 평방미터이고, 건물이 있는 면적만 8만 9000평방미터에 이른다. 학교는 4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1차 치료를 담당하며 50여 명의 입원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소형 병원, 강의실, 실험실, 480석 규모의 극장, 강당, 의료정보센터, 도서관, 컴퓨터실, 식당, 야구장, 축구장 등 체육시설, 세탁소 등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부터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학교였기 때문에 공부하는 학생들은 전혀 부담이 없다. 숙식, 의류, 교과서 등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있고, 많지는 않지만 생활비도 지급하고 있다. 처음 입학하면 이 학교에서 2년 반 동안 있게 된다. 외국의 교육체계가 차이가 있고 학생들의 수준차도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 입학하면 6개월간의 연수기간을 거친다. 이후 2년 동안 기초과학단계(1, 2학년)를 지나 3학년부터 쿠바의 각 지역에 있는 21개 의과대학에 가서 쿠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된다. 또한 3학년부터는 4년 간 쿠바의 병원에 들어가서 실습을 병행한다. 이렇게 총 6년 반의 교육과정이 이어진다. 졸업할 때는 ‘General Medicine Doctor(일반의)’ 자격을 갖게 된다. 일반의가 되고 나면 전문의 과정을 밟을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그란마’ 해군사관학교를 의과대학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쿠바의 무상의료 시스템과 수준 높은 의료기술 때문에, 소위 ‘의료 관광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양질의 의료혜택을 누리기 위해 외국에서 해마다 5000명 이상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 조사에 의하며 쿠바는 영아 사망률이 낮고 평균수명이 높은 나라로 의료에 있어 선진국 수준이라고 한다. 의사 1인당 국민 수에서는 쿠바가 어느 나라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쿠바의 ‘가정의’ 시스템에서 의사들은 자기가 ‘관리’하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 습관, 주위 환경, 가족관계 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환자의 발병원인을 사회적 관점에서 찾는 것이며 병이 생겼을 때 약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생기기 전에 그 원인을 없앤다는 것이다. 전 국민의 99%를 포괄한다는 가정의와 그를 중심으로 한 예방의학, 이게 쿠바 의료혁명의 핵심이다.
가난하지만 모두가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라와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가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나라, 과연 어디가 행복한 나라인지 생각해 본다.
의과대학을 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CTA(농업 컨설팅 숍). 도시 생태농업을 컨설팅해주는 곳이다. 분변토와 각종 씨앗, 새로운 농업 기술 자료를 판매하고 기술 전수도 무료로 하고 있다. 국영 기관이지만 기본 월급 외에 판매 부수입의 50%는 개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직원의 90%이상이 농업전문대학을 졸업했고 농장에 투입돼 농민들의 작업을 돕기도 한다. 국가가 생태농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기관 중 하나이다. 붕괴하고 있는 우리 농업을 생각하니 이런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부럽다. 장애를 가진 취업 준비생의 수줍은 미소를 뒤로 하고 혁명 박물관으로 향했다.
혁명박물관.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대통령 궁이던 것을 혁명 이후 혁명박물관으로 개조했다.
혁명박물관의 전시품들. 노예들의 족쇄, 혁명군이 사용하던 무기, 투쟁과정에서 사용하던 차량,
추락한 미군 전투기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전시되어 있다.
친미 독재시절 대통령 관저로 쓰던 곳을 혁명박물관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벽면의 총탄자국은 독재자 바티스타를 암살하기 위해 대통령 궁을 습격했던 학생 지하조직이 남긴 것이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와 같은 저항과 투쟁, 희생 끝에 현재의 쿠바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카스트로 또한 쿠바 혁명의 과정에서 여러 번의 실패를 겪는다.
박물관 내부는 독립운동과 혁명과정을 보여주는 각종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바티스타의 집무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화려한 천장과 샹들리에가 사치스럽고 부패한 과거 정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쿠바 역사는 슬픈 역사이면서 동시에 승리의 역사다. 스페인의 침략과 인디오의 멸족, 아프리카 노예의 강제 이주, 스페인에 이은 미국의 식민지 착취, 그리고 혁명의 역사를 가졌다. 인디오의 저항, 노예들의 해방운동, 독립투쟁과 혁명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실패와 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지금도 쿠바는 미국의 봉쇄 속에 독특한 방법으로 혁명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쿠바의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호세 마르티 동상과 체 게바라의 초상은 이런 혁명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쿠바 인민의 의지이다.
 
인터뷰  빅토르 씨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대외협력 담당 부총장)
인민 도울 의사 무료로 키우는게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목적
 
- 설립 목적에 맞게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봅니까?
“대부분의 학생은 졸업과 함께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의사 일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8년 동안 했던 일에 대해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우리 대학의 기본적인 목적이 여기서 양성된 의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가난한 민중들을 치료하는데 있는데 지금까지 이러한 점에서 성과가 컸다. 인간적으로 좋은 의사, 자기 인민을 도와주려는 의사, 자기 나라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른 나라로 달려가서 도와줄 수 있는 의사들을 양성해 왔다.”
 
- 연대성, 봉사 정신 등 가치관에 대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프로그램에 특별히 사상 관련한 교육이 있지 않다. 특히 쿠바 사회주의 이념 등에 대한 별도의 교육은 없다. 6년 동안 쿠바에서 살면서 쿠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연대의식이 생겨난다. 또한 현장 실습을 많이 나가는데 그곳에서 봉사하는 의사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별도의 가치관 교육이 필요 없다.”
 
- 쿠바의 의료 체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전체 인민이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같은 병원에서 같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인 병원이 따로 있고 돈을 받지만, 사고가 나거나 생명이 위태롭게 되면 무료로 치료해 주고 있다. 또한 우리 의료체계의 기본특징은 병이 발생한 후에 치료하는 것보다 병이 생기기 전에 발병 원인을 제거하는 예방의학을 중시하고 있다.”
 
- 학생 선발 과정은 어떻습니까?
“나라마다 선발방법이 다르다. 어떤 나라는 정부가 쿠바에 학생을 보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 선발에 정부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정부기구, 쿠바를 지지하는 단체들이 가난한 학생들을 선발, 추천한다. 아직까지 아시아에서는 한 나라도 없다.”
 
장애는 사회적 책임
쿠바에서 6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쿠바 경제, 정치 상황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원래는 쿠바의 공장을 방문하고 노동자들과 직접 만나는 일정을 잡으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여 아쉬웠다.
쿠바 노동조합은 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협력하는 관계에 가깝다고 한다.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조합원의 불만을 사기도 한다고. 당과 노조의 역할이 분리되어 건전한 비판이 존재할 때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펠리페 선생님의 말에 수긍이 간다.
쿠바의 화폐는 두가지 종류이다.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전환 페소(CUC)’와 쿠바 인민들이 사용하는 ‘쿠바페소(CUP, NM)’가 그것이다. 쿠바페소는 전환 페소의 1/24의 값어치다. CUP를 사용할 수 있는 상점과 CUC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다. 외국인들은 대부분 전환 페소를 사용해야 하지만 길거리에서 파는 햄버거나 음료, 시장 등에서 파는 고기, 야채, 과일 등을 사는 데는 쿠바 페소를 사용할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CUC를 취급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사이에 빈부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쿠바는 일부 시장을 인정하고 있는데 농민시장, 식당과 민박 등 일부 개인영업을 허가하고 있다. 물론 부가 편중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철저한 불법 단속과 엄청난 세금을 매기고 있다. 쌀, 달걀, 치약, 비누 등은 기본 원가보다 저렴하게 배급소에서 보급하고 있으나 그 외의 생활 용품 및 가전제품은 고가로 살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중경제의 가장 커다란 문제 중 하나는 인민들 내부의 차별이 조장되고 있고 부도덕한 불법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정부에서도 잘 알고 있지만, 당장 필요한 외화획득 문제 때문에 적절한 대책을 세우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이중경제가 야기하고 있는 이러한 딜레마를 잘 풀어나가는 것이 쿠바 사회주의의 미래를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과제로 보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등교하고 있다.
 
‘Hogar castellana(오가르 까스떼야나)’, 다운증후군 학교다. 학교에 들어서자 긴장된 모습의 교장선생님이 우리를 맞아준다. 알고 보니 지금의 교장선생님은 임시로 교장직을 맡고 있고 원래 교장선생님은 베네수엘라 장애 교육을 위해 파견 중이라고 한다.
쿠바는 장애 교육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Hogar castellana는 보건부 소속 중증 장애인 학교다. 이곳에서 언어 능력 향상, 자립 훈련, 직업 훈련, 산수 개념 습득, 가정생활 훈련, 기능 습득 훈련, 문예활동, 자유 시간 활용에 대해 배운다. 졸업 후 여러 기관에 취업을 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 돕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각 학교는 작업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우리가 간 곳은 농장과 수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작업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동의 교육을 돕기 위해 교사 뿐만 아니라 의사, 치료사, 간호사가 배치되어 있어 장애아동을 위한 포괄적인 지원이 이뤄지고 있었다.
학교 농장에서 농장의 작업을 돕고 있는 80대 할머니를 만났다. 인민훈장까지 받은 할머니라고 한다.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고 계신 할머니를 보니 가슴이 따뜻해진다. 학생들이 만든 예쁜 인형을 선물 받고 흐뭇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자유롭기 위해서 배운다!
쿠바의 교육사상은 호세 마르티의 ‘자유롭기 위해서 배운
다’이다. 혁명광장 앞에 있는 호세마르티 동상과 기념탑.
 
다음으로 간 곳은 아바나 시내에 있는 앙헬라 란다(ANGELA LANDA) 초등학교이다. 앙헬라 란다는 이 학교의 설립자 이름이다. 입구에는 그녀의 동상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쿠바 교육의 모토가 ‘자유롭기 위해 배운다’인데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이 참으로 자유롭다. 책상 배치도 멋대로이고 실내도 무척 시끄럽다. 쿠바의 초등 교육은 우리와 같은 6년제이다. 1학년에서 4학년까지는 한 선생님에게서 배우고 5, 6학년이 되면 다른 선생님에게 배운다. 체벌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평가권이 교사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평가 결과로 아이들을 줄 세우지 않으며 결과는 부모님과의 상담에 활용한다. 가정과 연계한 교육을 중시하는데 모든 학부모와 상담을 의무화하고 있다.
쿠바에도 교원 평가가 있다. 학부모의 의견과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ABC 등급을 매긴다. C등급을 받은 교사는 교장선생님과 면담을 해야 하고 A등급을 받은 교사에게는 식당 이용권과 같은 작은(오히려 물질적인 것보다는 도덕적인) 인센티브가 주어진다고 한다. 특히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교사가 많아 교원평가와 학교장 상담이 꼭 필요하다고. 쿠바가 풀어야할 숙제 중 하나가 교사양성 문제라고 한다.
학교를 둘러볼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낮잠을 자고 있는 유치원생(대부분의 초등학교가 유치원반을 두고 있다)들이었다. 천사와도 같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맘이 포근해진다. 컴퓨터실에서 게임을 하는 아이, 복도에 누워 숙제하는 아이, 선생님과 보드게임을 하는 아이, 바깥에 나와 공놀이 하는 아이….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카메라에 충분히 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지만 다음 일정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학교를 나왔다.
 
앙헬라 란다 초등학교의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

다음으로 간 곳은 구 시가지 내의 아바나 환경을 지키는 비정부기구 건물이다. 우린 그곳에서 ‘체 게바라 연구소’ 소장이며 체의 셋째 딸인 알레이다 게바라와 면담을 가졌다.
체 게바라의 어린 시절, 혁명사상, 혁명가로서 모범을 실천했던 체의 삶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쿠바가 체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얘기는 너무 감동적이었다. 인간을 중시하고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문제는 쉽다. 하지만 물질에 지배받지 않고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갖는 문제, 개인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연대하는 정신을 배우는 문제가 더 어렵다고 했다. 나름의 교육을 통해 의식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다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 지도층이 모범을 보이는 것이라 했다.
누군가 한국에 대해 물었다. 각자 국가는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왜곡된 매체를 통해 접하기 때문에 쉽게 평가할 수 없다는 그녀는 그 나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곳의 인민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했다. 역시 혁명가의 딸다운 대답이다.
마지막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쿠바는 나름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 연대를 중심에 둔 사회를 위해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교사와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꼭 훌륭한 교사가 되길 빈다.”
체 게바라의 딸이자 체게바라 연구소 소장인 알레이다 게바라 마치
 
쿠바에서의 마지막
쿠바에서 머물 수 있는 마지막 날 우리는 아바나 시내에 있는 ‘오르가노포니코(organoponicos)’인 상하이 농장을 찾았다. 상하이 농장은 1ha 미만의 작은 농장이지만 쿠바에서 최초로 도시농업을 시작한 곳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유기농 채소들은 농민시장보다 저렴하게 아바나 시민들에게 공급되고 있다.
원래 쓰레기장이었던 곳을 농장으로 만든 이곳에서는 벽돌로 화단을 만들고 흙과 퇴비를 채워 채소를 키우고 있다. 화학비료를 대신해 양분이 풍부한 지렁이 분변토를 이용하고, 농약 대신 해충방지식물, 천적 등을 이용해 해충의 피해를 줄이고 있다. 물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각 구역마다 스프링클러가 따로 설치되어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기본급을 받고 수입의 80%를 가져간다고 한다. 쿠바는 농민의 경제 사정이 많이 좋은 편이다. 아바나에는 이런 농장이 곳곳에 있다.
쿠바 최초로 도시농업을 시작한 오르가노포니코, 상하이 농장
 
알레이다의 권유로 들른 장애학교 역시 많은 감동을 주었다. 특히 손님들을 위해 온전치 못한 몸으로 보여준 공연을 통해 자기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들의 힘찬 걸음을 보았다.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가난한 이 나라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눈에 보여 가슴이 뭉클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농업산림기술자협회(ACTAF)’의 작은 사무실이었다. ACTAF는 쿠바 정부가 도시 농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농민, 농업 기술자 및 연구자들의 협동조합이다. 모든 회원은 자발적으로 가입하고 회비 납부의 의무를 가진다. 현재 회원은 2853명이며 고등기술자, 연구원 및 학생 회원까지 포함되어 있다. 농민을 지원하고 교육하는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는데 현재는 농업 첨단화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ACTAF 건물에 쓰여진 ‘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ACTAF를 나와 ‘기초단위협동농장(UBPC)’을 찾았다. 이 농장은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협동농장과 달리 국가로부터 토지를 대여 받아 여러 명이 함께 운영하는 협동조합농장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아바나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협동농장으로 도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설립되었다.
대부분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식량과 기타 생필품을 소련에 의존했던 왜곡된 농업구조는 소련의 붕괴로 어려움에 봉착한다. 사상 초유의 기아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비료 및 농약의 부족, 원유 부족 등으로 국내 농업생산 역시 떨어졌다. 이 계기를 통해 쿠바가 고민한 것이 도시 생태농업이다. 비료와 농약을 치지 않고 소규모로 할 수 있으며 운반비를 들이지 않고 시민에게 바로 채소를 공급할 수 있는 농업 체계이다. 이때부터 쿠바는 ‘지속 가능한 농업’, 즉 환경을 파괴시키지 않는 건강한 농업을 고민하고 발전시켜 온 것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채소는 학교와 공공기관으로 공급된다. 농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대부분 퇴직한 분들이라 하니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도 한 몫 하고 있는 셈이다. 수입의 50%는 조합원들에게 돌아가며 나머지 50%는 연구 개발비로 쓰이는데, 매일 매일의 생산실적 및 재정보고를 통해 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있다. 사용하고 있는 토지는 국가 소유이나 임대료를 거의 내지 않는다.
도시생태공원. 나무에 붙어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것은 보기에는 멋있지만, 나무를 죽이는 기
생수라고 한다. ‘카스트로의 수염’이라고도 불리는 이 기생수를 당국에서 없애려 하자, 시민들
이 “수염 없는 카스트로는 없다”며 반대했고 결국 다른 나무를 더 심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
다고 한다.
쿠바의 거친 흙을 비옥한 토지로 바꿔주는 일등 공신 중의 하나가 바로 ‘지렁이’이다. 농장에는 지렁이를 기르고 분변토를 만드는 곳도 있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지렁이가 흙속에서 꿈틀대며 퇴비를 만드는 현장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직접 재배한 천연 유기농 채소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이번 기행의 마지막 코스인 아바나 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아바나 시내를 관통하는 알멘다레스 강을 따라 형성된 원시림은 과거 무자비한 개발과 오염으로 많이 파괴되었다. 국제환경단체의 도움으로 도시원시림의 복원을 위한 100년의 계획을 세워 정화하고 있다.
 
 
쿠바 장애정책, 교육-일-삶 조화
  한국은 특수학교 졸업 후 평생 유료 시설 생활
  글❚유용복 특수학교 교사 / 사진❚월간 <노동세상>
특집Ⅱ 쿠바기행단보고
 
쿠바 여행 일정표를 받았을 때 장애인학교 및 농장견학이 소개돼 있는 비고란에 ‘다운증후군’이라고 쓰여 있어 과연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장애인 교육시설은 어떨까 하는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안내하시는 분은 내가 특수학교 교사며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하자, 기대를 하고 와도 좋을 거라고 하셨다.
여행이 시작되고 닷새째가 되는 날 아침, 드디어 장애인학교로 출발했다. 차에서 내려 발을 내딛는 순간, 들어가는 입구가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것이 마치 어떤 농장이나 공원을 들어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운 나라인 만큼 길 양쪽에는 나무가 푸르고 길게 늘어서 있다.
다운증후군 학교 ‘Hogar Castellana(오가르 까스떼야나)’ 학교 팻말이 입구에 커다랗게 서 있다.
우리에게 친절하게 학교 설명과 소개를 해 준  로베르또 교장 대리.
학교 팻말에는 ‘Hogar Castellana(오가르 까스떼야나)’라고 쓰여 있고 책 그림과 뇌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학교를 책임지고 계신 로베르또 노보아 선생님의 학교에 대한 소개가 시작됐다. 원래 교장으로 재직하고 계시던 분은 여자 선생님인데 잠시 베네수엘라에 특수교육을 지원하러 가셨고, 지금은 로베르또 선생님이 임시로 교장 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혁명 이전의 쿠바에는 별도의 장애인 학교가 없었고, 개인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쿠바 국민의 교육에 관심을 돌리고, 문맹퇴치 운동 등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62년부터 지체장애인 특별교육부서가 생겼다.
이 학교는 원래는 일반병원이었으나 63년부터 증후군 등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다운증후군 같은 중증 장애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63년~67년까지의 단계에서는 중증 장애인들을 수용하고 돌보아 주는 수준이었다.
67년에 유럽사회주의 나라에 유학했던 학생들이 돌아왔고, 그 중 특수 장애 분야를 전공했던 학생이었던 에멜리아(현 교장)가 교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 때부터 전문적인 증후군 연구 및 교육 사업을 진행했고, 전문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2001년도부터는 쿠바 보건부에서 장애인에 대한 전국적 조사사업과 함께 장애와 관련한 유전학적 연구, 장애인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에 대한 역학조사 등을 병행하면서 큰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장애문제를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한다.
교실 입구에서부터 우리와 다른 그들만의 교육체계를 엿볼 수 있었다. 학교 교육의 목적은 스페인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과 자립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교육은 우리나라의 학년 개념과는 달리 6살∼18살까지의 학생을 장애 정도나 교육 능력에 따라 1∼7등급으로 나누고 각자의 수준에 맞는 무학년제 수준별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학교입구 벽에는 학생들이 함께 제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학교 안에는 기숙사, 세탁소, 의무실, 농장 등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현재 교육 받고 있는 학생은 62명이고 교사 12명에 보조교사, 의사 3명, 간호사 22명(24시간 교대), 심리치료사, 물리치료사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또한 7급 이상의 과정을 수료한 100여명의 장애인들이 학교 내의 유기농장, 수예품 공장, 학교 세탁소, 식당 등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교사와 보조교사만 있는 우리의 특수학교 체제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교육은 장애 정도에 따라 기간과 수준이 정해지며 스스로 자립하여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지금까지 이곳을 졸업한 3만 여명의 학생들은 농장이나 수공업 등의 분야에서 일을 하며 사회에 적응하고 있다.
기숙사에는 18세 이상의 남자 110명이 기숙하고 있고 분야별 전문가들이 도움을 준다. 오전 8시∼오후 4시까지 교육을 받거나 일을 하고, 4시 이후에는 텔레비전 시청, 장기, 오락 등 자유 시간을 가진다. 학부모들의 모임도 분야별, 수준별 만남의 시간이 있어 서로 상담을 하며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입학은 학부모 면담으로 할 수도 있고, 의사진단이나 보건부 혹은 그 소속 주의 심사를 받아 이뤄질 수도 있다.
쿠바 정부는 전체 인구 1천 2백만 명을 다 조사해 장애인구 1.25%, 즉 14만 명을 전부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특수학교는 장애영역별로 전국에 401개가 있어서 지역별, 연령별 구분에 따라 장애인 100%를 다 수용한다. 우리와 방문한 학교와 같이 큰 규모는 전국 14개 중에 36개가 있고, 교육과 직업, 재활이 다 이뤄진다.
직업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 내 작업실. 여기서 생산된 상품들은 별도
로 판매된다.
 
오가르 까스떼야나만 보더라도 면적이 5ha, 즉 1만 5천 평 규모로 학교와 각급 시설, 농장 등이 모두 한 울타리 내에 있다. 농장에서는 이곳에서 필요한 야채를 유기농으로 키워서 전부 자급자족해 해결한다고 한다.
1만 5천 평이라면 정말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쿠바의 경제적 조건이 어렵기 때문에 시설 면에서는 조금 낙후되어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심리치료, 재활교육, 예능교육, 직업교육 등 충실한 교육을 하고 있었다.
로베르또 선생님의 안내로 학교 안을 돌아보았다. 교실뿐만 아니라 직업교육을 진행하는 작업실(분야별로 책상에 둘러 앉아 인형을 만들기도 하고 사포로 문질러 악기를 만들거나 접시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농장 등을 둘러보았다. 다른 한 편에는 완성된 작품들이 진열돼 있고 그 작품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방문 기념으로 받은 여러 색깔과 모양의 인형들은 그들의 정성이 묻어나는 고마운 선물이었다.
학생들이 정성껏 준비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이 곳에서는 장애인들을 대
상으로 다양한 예능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이어서 외국 손님인 우리를 위한 공연이 시작됐다. 아름다운 다운증후군 아가씨가 멋진 드레스를 입고 나와 춤을 추고, 자폐나 정서 영역의 장애를 가진 청년들이 오르간 솜씨를 보여주기도 했다. 학생들의 연극과 여러 가지 공연은 선생님들이 장애 정도에 맞춰 교육한 결과였다. 예를 들어 오르간 건반에는 음계에 따라 여러 가지 색 테이프를 붙여 열심히 연습해 멋진 연주 솜씨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평생 여기서 교육받고 생활하며 직업을 갖고 살 수 있다고 한다.
통역과 전문성 문제 등으로 충분하게 소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교사와 학생들의 눈빛을 통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 국가여서 어차피 교육과 의료가 다 무상이기 때문에 국가 정책 상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특수교육을 하고 대부분의 시설들이 정부지원으로 운영되는 것은 우리나라도 쿠바와 마찬가지인데, 개인이든 단체든 그룹 홈, 보호 작업장(자립장, 근로사업장) 등이 있고 적지 않은 장애인 단체가 있는데, 왜 우리나라의 장애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고충은 끝이 없을까? 당장 며칠 후면 우리 학교도 졸업식이 있는데, 부모님들은 “졸업 다음날부터 우리 아이를 어디에 보내야 하나요?”라며 답답해하고 한탄을 하지 않는가?
나는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면 나라의 예산도 잘 쓰여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특수교육을 하는 입장에서 장애인들의 사회복귀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장애 학생들은 특수학교에 다니는 동안 돈도 거의 들지 않고 안전을 보장받지만 학령기가 끝나면 갈 곳이 없거나 아니면 그 때부터 평생 돈을 주고 시설에 맡겨야 한다. 학교에서 직업을 알선 한다 해도 적응이 어렵고 최저임금과 열악한 환경의 직종이 대부분이다. 특수교육을 하더라도 그 교육의 효과를 사회적으로 보장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는 교육기관이니까 교육에만 주력 하고, 시설은 좀 더 깨끗하고 나은 시설을 만드는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돼 가고 있다. 기업은 법률에 따라 생색내기 식으로 장애인 고용을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은 시설별로 특성화 사업이다 뭐다 하면서 ‘폼 나는’ 시스템과 프로그램이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지만, 과연 장애 자녀를 둔 가정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나라 장애 학생들은 졸업 후 다시 순서를 기다려 복지관에 문을 두드려야 하고, 어렵사리 선발 되어도 연한 제한에 묶여 1, 2년이 지나면 또 다른 곳을 찾아 나서야 한다.
‘보호 작업장’이라는 곳도 장애 영역별로 다르게 운영하는 경우가 많고 개인단체들이 만든 실정이다 보니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부모들은 장애 자녀들이 나이가 들어가면 그 때부터 전국의 시설들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받아 줄 곳이 있는지, 부모가 죽고도 맡아줄 곳이 있는지, 한 달 생활비는 얼마를 내야 하는지, 시설은 좋은지 등등 따져보면 보낼만한 시설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런 대책 없이 장애 자녀를 집에 데리고 살거나 그냥 방치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부모들의 아픔을 긴 세월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나로서는 이래저래 복잡한 생각이 많은 여행이었다.

 

자유롭기 위해 교육받는다
  특집Ⅱ 쿠바기행단보고
  글❚함유숙 청량초등학교 교사 / 사진❚월간 <노동세상>
 
 
호세 마르티 기념탑에서 만난 초등학교 아이들. 아바나 어디서나 선생님과 함께 구경하고 뛰노
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쿠바는 교육부문에서 무상교육을 실현한 나라이다. 혁명승리 이후 1961년 대대적인 문맹퇴치운동을 벌여, 8개월 만에 24%에 달하던 문맹률을 3%로 낮추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번 방문 중에 수많은 군중들이 대형연필을 들고 행진하는 사진을 보았는데, 아마도 그 당시 ‘문맹퇴치 캠페인’을 벌였던 장면 같았다. 대형연필을 들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에 배우겠다는 의지가 느껴지기도 하고, 조금은 익살스러워 보여 저절로 웃음이 났다. 소련 몰락 이후,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교육재정은 전혀 삭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쿠바 사회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교육환경을 비교하는 지표로 자주 이용되는 것이 ‘교원 1인당 학생 수’인데, 쿠바는 11~12명으로 OECD 평균보다 훨씬 낮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27.1명에 이르고 있다. GDP 대비 (공)교육비 지출 규모도 미국 6.7%, 일본 3.5%, 한국 5.3%에 비해 쿠바는 무려 10%를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이번 쿠바기행 과정에서 방문한 교육기관은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 다운증후군 센터, 지체 장애인학교, 초등학교 등 모두 4군데이다. 짧은 일정에 많지 않은 학교를 돌아보고 무슨 이야기를 자세히 쓰겠냐마는 교육자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커다란 책무감을 가지고 돌아온, 충분히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98년 허리케인으로 인해 중남미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고, 의료공백을 지원하기 위해 쿠바의 의사들을 파견하면서 카스트로가 구상하여 만들어졌다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의사를 키우고자 한다는 부총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훌륭한 의사를 많이 길러낸다는 교육자로서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하는 의사들이 제일 돈을 잘 버는 성형외과로 많이 몰린다는 얘기를 들은 직후라서 그런지 생명을 다루는 소중하고 고귀한 일이기 전에 돈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우리 시대 의사의 자화상이 생각나 입안이 씁쓸해져 왔다. 
봉사정신이나 휴머니즘적 가치를 가르치기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냐는 질문에 쿠바 사회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체득하게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뭔가 특별한 교육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의 답변을 듣고 적잖이 실망을 했다.
히말라야 오지에도 기꺼이 의료봉사활동을 떠나는 갓 스무 살이 넘은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런 결심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가르쳤을까? 하는 생각과 좋은 방법이 있다면 배워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칠 때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세태에 아이들이 물들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적인 공동체 가치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은 모든 교육자의 고민일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회시스템과 떨어져있는 가치교육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것인지 의문이 든다. 모든 인간이 건강할 권리가 있고 이를 보장해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의식과 제도 없이, 돈이 있고 없음에 따라 건강권이 좌우되는 사회시스템 아래서는 인간적 가치는 여전히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 의식은 사회적 교육을 통해 해결한다
장애인 교육시설로는 다운증후군 학교와 지체장애인 학교 두 곳을 찾았다. 원래는 다운증후군 학교인 ‘까스떼야나 학교’만 일정에 있었던 것인데, 알레이다 게바라의 소개로 지체장애인 학교인 ‘쿠바-파나마 학교’도 추가로 방문하게 되었다.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의식과 태도는 그 사회의 건강성을 가름하는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관타나메라’라는 쿠바 민요를 불러 주었고, 한
국에서 간 선생님들은 ‘올챙이 송’ 노래와 함께 율동을 보여주었다.

쿠바 역시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존재한다고 했다. 물론 가장 초보적인 장애시설 조차 만들지 않았던 바티스타 정권 시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부정적 사회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활동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끊임없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이 심리적 안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장애아동들이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움직이는데 장애가 있지만 ‘불편함’이 좌절로 이어지지 않고 ‘차이’가 편견으로 왜곡되지 않는다.
두 곳의 장애인 학교를 돌아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자부심이 대단히 크고 그만큼 성실하다는 것이었다.
밑그림을 그리고, 재단하고, 바느질하고, 사포로 부드럽게 목공재료를 다듬는, 느리지만 매우 정성껏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던 그들의 작업장은 배우고 이루겠다는 열기로 가득 차있었다.
무릎아래 두 다리가 없는데도 즐겁게 살사를 추면서 웃는 여학생, 두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입으로 꽃술을 물고 동작을 하는 아이,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했지만 도저히 하기 어려운 동작 외에는 어떤 도움도 없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장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업실을 소개할 때는 장애인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딴 얘기를 자랑하느라 바빴고, 공연을 보여줄 때는 이들의 예술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확인시켜 주고자 했다.
우리가 얼마나 장애를 터부시하고 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놀랐고 부러웠던 것은 쿠바의 체계적인 장애교육, 사회적응 시스템이다. 모든 장애아동이 100% 교육을 받고 있고, 장애정도와 개별적 특성에 맞는 체계적인 지도를 받고 있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인간적 권리까지 제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가 개인에게 가해지는 천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함께 책임지고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는 세상. 경제규모나 국민소득이 낮아서 실현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느꼈다.
 
자유롭기 위해서 교육받는다
자유롭기 위해 교육받는다. 쿠바 혁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호세 마르티의 교육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내가 교육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 아이들은 자신이 교육받는 목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쿠바를 여행하는 내내 아이에게 진정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지 끊임없이 묻고 물었다.
쿠바의 초등 교육은 우리와 같은 6년제이며 중등교육은 중학교 과정인 7~9학년, 대학준비 과정인 10~12학년 등으로 9학년까지 의무교육이다. 학제나 학교운영 방식 등 형식적인 면에서는 우리와 큰 차이가 없어보였지만 그 모든 것에서 관통되고 있는 교육 철학은 남달랐다. 예컨대 학생과 교사에 대한 평가제도가 있었는데 ‘경쟁과 도태’를 기본원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존중’ ‘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학생에 대한 평가 자료는 학부모와의 상담의 근거로, 가정과 연계한 교육의 기초로 사용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잘 지도하기 위해서 가정도 잘 알아야 하고, 학부모도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잘 알아야 교육의 효과가 높아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교원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낮은 평가를 받은 교사는 교장선생님과의 면담, 학습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높은 평가를 받은 교사는 도덕적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행정 관료와도 같은 한국의 교장 제도와 달리 쿠바의 교장은 일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교사들의 상담자, 스승이기도 했다. 교장도 1주일에 1~2시간 수업을 하며 교장이 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교장이 되어서도 계속 공부를 해야만 한다고 한다. 학교운영과 관련하여 월 1회 이상 교사-교장 미팅 시간을 통해 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함께 머리를 맞댄다.
아바나의 ‘앙헬라 란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학생평가기록표를 보여준다.

아바나의 ‘앙헬라 란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 우리 일행들 대부분이 교사라고 하니까 “좋은 것을 배워 우리 아이들을 좋은 일에 쓸 수 있도록 잘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정말 축하한다”고 하신다. 그래. 교사가 된다는 것,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자주 까먹는 건 아닌지.
앙헬라 란다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374명이고, 5살까지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치원이 함께 있었다. 교실 당 20명 정도의 학생이 있는데, 담임이 전 과목을 가르친다고. 교육과정은 스페인어, 수학, 역사, 자연사, 운동, 노작교육(실과), 영어(3학년부터) 외에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등을 실험적으로 운영 하고 있다. 수업시간은 아침8시부터 오후 5시이고 학교 내에는 방송실, 음악실, 컴퓨터실, 도서관 등의 시설이 있었다.
교사들이 수업 외에 잡무가 있는지 질문하자, 어리둥절해 하셨다. “교사들은 오직 애들 수업만 하고 자기 공부만 하면 된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수업이 최고다!” 그렇지. 수업이 최고지! 남에게 보여주거나 실적을 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서로 교감하고 학문과 배움의 열정을 불사르는 그런 수업이 최고지. 하지만 수업 자체 보다 여러 가지 할 일이 넘쳐나는 우리네 교육현실, ‘짬나면 수업한다’는 슬픈 농담을 던지기도 하는 우리 처지를 생각하니 갈증이 난다. 언제쯤 되어야 수업에만 열중할 수 있는 세상이 될까?
물론 정기적으로 시험도 본다. 10주 간격으로 시험을 보는데 주관식과 객관식 혼합문제이고 반마다 시험문제가 다르다고 한다. 반의 담임선생님이 시험문제를 출제하기 때문인데 평가권이 교사에게 있다는 뜻이다. 부족한 학생은 교사들이 특별 지도하며,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 아이들의 장래에 등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도 지금 등수를 매기지는 않고 있으니 예전보다 많이 발전되었지만 입시경쟁제도가 그대로 존재하기에 여전히 시험에 대한 중압감은 크다. 희망하는 학생들만 대학에 진학하며 물론 무료이다. 대학등록금 1천만 원 시대에 걱정 없이 교육을 받을 날이 언제일까? 영어 몰입교육 운운하면서 공교육을 파괴하고 ‘교육 시장’을 중심에 놓는 시대에 ‘사회적 가치’와 ‘사회적 교육’을 거론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공상에 불과한 것일까. 아이들의 맑은 미소를 뒤로 하고 나오는 내 발걸음은 내가 직면한 교육현실의 무게감 때문일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유로운 아이들, 지속가능한 미래가 있는 사회
‘자유롭기 위해서 교육받는다’는 교육 이념을 몸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쿠바의 학생들은 정말 자유로웠다. 말레콘의 해변에서, 호세 마르티 기념탑에서, 아바나의 어느 광장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은 항상 호기심에 그득했고, 낯선 이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그런 아이들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 사회가 편견으로부터 매우 자유로운 사회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모두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쿠바는 현재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장애나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과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꾸고 일궈나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더 많은 부를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고, 경쟁에서 도태되면 패배, 무능력자로 취급하는 풍조 속에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해 본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 것인가?

출처 : Have a 'visible hand' dream
글쓴이 : 일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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