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해서 밥 벌어먹고 살겠나?
89년도에 양평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외국어대학교를 입학했다. 대학 다닐 때 기자가 되는 게 꿈이어서 학보사 기자를 했다. 4학년 때 군대를 다녀와서 92년도 군번이다. 대학 졸업 후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교육운동 상근자로 7년을 일했다. 97년부터 2004년까지 전교조 선생님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전교조에서 첫 일 할 때 월급이 70만원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일해서 적지만 돈 버는 일이 너무 행복했다.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나서 월급이 매년 많이 올랐다. 거의 180만원이 넘었다. 전교조 상근 마지막 몇 달은 200만원 넘는 월급을 받았다.
2004년 6월1일부터 민주노동당 최순영의원 보좌관을 했다. 당에서 정한 월급 180원을 받았다. 3년 후 보좌관 협의회와 당 사무총장과 협의를 해서 월급이 210만원이 되었다. 그 이후 내 월급은 100만원이 넘지를 못했다. 물론 약간의 알바로 150만원을 넘게 번 적도 있기는 하다. 2010년 민주노동당 용산구 구의원을 출마해 낙선하고 그 해 7월부터 용산구 지역위원장을 2년 동안 하면서 매월 60만원의 활동비를 받았다. 2012년에 희망먹거리네트워크 상근자로 100만원의 활동비도 받았다. 지금은 용산구 아동교육복지 코디네이터로 80만원의 활동비를 받고 있다. 역시 가끔 강의나 여러 가지 곁가지 일로 부수입인 몇 십만 원을 벌기도 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꽤 궁금해 한다. 월급이 얼마냐고? 애 둘 키우면서 어떻게 먹고 사냐고? 궁금해 하는 게 당연하다. 시민단체나 진보정당 활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있거나 배우자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면 그나마 나을 것이다. 그런데 내 아내 분도 시민운동가여서 우리는 결혼해서 항상 가난하게 살았다. 그렇다고 찌질하게 살지는 않았다. 물론 가끔 돈이 없어 구질구질한 삶이 짜증나기도 했었다. 카드 값이 밀려 노심초사한 날들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래도 할 것 다하면서 살았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가고 나서는 여행도 일 년에 세 네 번씩 자주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지금도 부부 월급 합쳐야 150만원도 안되지만 우리 가족은 친환경 유기농 매장인 용산생협에서 먹거리를 사다 먹는다.
그럼 그 작은 수입으로 어떻게 먹고 사냐고요? 물론 저축을 못하지만 빚도 없다. 아이들 초등학교는 거의 교육비가 들지 않는다. 친환경무상급식이니까 더 교육비가 절감되었다. 사교육은 시키는 것이 전혀 없다. 방과 후 마술, 클레이아트, 우크렐레를 배우는 게 아이들 교육비의 전부이다.
아이들 옷은 거의 주변 친척이나 이웃들에게 물려 받아 입혔다. 요즘에는 헌 옷이 헌 옷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좋은 옷을 제공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나나 아내도 아는 사람들과 술이나 밥을 먹을 때 회비 1만원 정도 내는 것 외에는 그렇게 크게 돈 쓸 일이 없다. 옷도 대충 입고 다닌다. 아름다운 가게나 재활용 매장에 가면 이른바 메이커 있는 바지나 셔츠도 만원이 안되기 때문에 계절 별로 몇 벌의 옷을 사도 돈이 별로 안 든다.
먹을 것 구입비, 차 주류비, 그리고 각종 모임 참석 회비, 경조사비가 우리 가족의 가장 많은 지출의 부분이다. 적게 쓰는데 150만원이면 충분 할 텐데 요즘에도 밀린 공과금, 카드 값에 시달리는 이유, 제일 골칫덩어리는 가난하게 사는 놈이 많은 곳에 후원을 하고 있다.
각종 시민단체에 후원하는 돈이 정확히는 몰라도 20-30만 원 정도이다. 이러니 구제불능이 또 있을까 싶다.
참여연대, 참교육학부모회, 민족문제연구소, 장애인차별철폐연대, 희망먹거리네트워크, 용산희망나눔센터, 용산연대, 청소년단체 희망, 환경운동연합, 교육희망네트워크, 서울일반노조, 희망연대노조 나눔재단, 고래이야기 도서관, 서울노동광장 등등...하나씩 줄여가야지 하면서도 아직도 그대로이다. 더욱이 1년에 1개씩 후원단체가 늘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나는 가난한 삶을 택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가난을 선택해 사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 가난한 이들에게 복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문제는 가난이 갈등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부부간의 갈등이 특히 더 걱정이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나도 그런 일을 가끔 겪곤 하니까 더 마음이 애리다. 시민운동, 사회 곳곳에 필요한 낮은 운동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생계비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빠른 시일내에 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전교조 상근자 시절 어떤 선생님이 내 관상인가, 손금을 보시고 “이원영씨는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아도 돈이 따라 다니는 팔자”라고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이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참 좋았다. 힘들 때마다 고비를 넘길 수 있게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 같고 수입이 적어도 아직 빚 없이 사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원영 12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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