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러 험한 정치의 길에 후회도!
나는 정치인이 꿈은 아니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이 된다거나 장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지금은 없다.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빨리 시골에서 농사 지으면서 땀 흘리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뭔가를 가꾸고 거두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길에 접어들었는지, 참으로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다. 20대에 대학졸업 후 전교조 7년 상근 활동을 마치고 고향인 양평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려고 했었다. 그 때가 2004년이다. 평생 농부이신 아버지와 상의했고 신혼생활을 시작한 세현과도 상의를 마쳤다. 아버지는 각박한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사는 것도 좋다며 흔쾌하게 동의해 주셨다.
그런 와중에 일이 꼬였다. 다른 선택지가 내게 주어진 것이다.
2004년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10명이 기적적으로 국회에 입성한 해였다. 국민승리21 시절부터 민주노동당에 가입해서 당비를 내왔고 선거 때는 선거운동도 잠깐씩 했었다. 그 덕분인지 최순영 국회의원 교육정책 보좌관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전교조에서 함께 상근하던 홍진관 선배와 함께 제안을 해왔는데 먼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학보사 동기 김태수에게 그 일이 해볼만한지를 물었다. 김태수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보람도 있을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만약 그때 그 제안을 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양평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행복지수가 한 뼘은 높을 텐데 후회도 많이 된다. 아이들도 시골 산천 속에서 키우고 있을 것이니 참 좋았을 법하다는 아쉬움이 가슴 한 켠에 무겁게 있다.
2004년 6월부터 2008년 5월까지 꼬박 4년을 국회의원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의 단맛 쓴맛을 보았다. 최순영 국회의원은 부천을 지역구로 정해 2008년에 출마를 했는데 아쉽게도 당선되지 못했다.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면서 4년 동안 교육정책 전반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다. 교육 관련 법들도 꽤 들여다보았다. 학교급식법 개정, 장애인교육법 제정 등 여러 가지 제도 개선도 제법 했다. 혼신을 다해 일했고 참으로 보람이 있는 시간이었다. 국회의원 보좌관이라는 직업이 노동 강도가 장난 아니었지만 4년 국회 밥을 먹으면서 혹독한 정치수업을 경험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정치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생업 때문에 바쁘게 살아가는 국민들은 정책의 향방을 결정하는 법과 예산의 영향력을 잘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법은 국민들에게 너무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국회는 싸움질을 하는 곳이지만 왜 그렇게 싸우는지를 나는 알게 되었다. 권력의 최전선에서 정치인들을 자신들을 지지하는 쪽을 위해 총성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 최순영의원실에서 가장 중심을 두어 개선을 하려고 했던 교육 정책들을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 아이들의 건강한 학교급식을 위해서는 학교급식법에 건강한 농산물을 학교급식에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식재료 사용 기준을 잘 넣어야 한다. 그래야 심심하면 발생하는 식중독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장애인 학생들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특수교사 배치와 장애인교육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법률 규정이 만들어져야 한다. 대학 등록금도 마찬가지이다. 치솟는 대학등록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등교육법 등이 개정되어야 한다. 또 법 취지에 맞게 정책을 잘 만들어서 정부 예산을 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육 정책에 대해 정부와 타 국회의원들과 힘겨운 싸움을 할 때 가장 큰 힘이 된 사람들은 그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시민단체 분들이었다. 특히, 장애인 학부모 단체와는 4년 가까지 동거동락 하다시피 하면서 장애인 교육지원법 제정에 힘을 기울였다. 장애인 학생들에게 교육권을 보장할 수 있는 법안을 새로 만들기 위해 매주, 혹은 격주 단위로 만나서 토론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기어코 좋은 법을 만들었고 그 법을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에서 통과 시켰다. 그 과정에서 숱한 토론회, 공청회, 농성, 집회, 간담회를 진행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법이 통과된 날 국회의사당 본관 로비에 전국에서 모인 장애인 학부모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나도 저절로 나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험난하고 피곤한 정치의 길로 접어든 결정적인 순간이이 때였다.
진보정당 활동은 아직도 힘겹고 희망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삶을 바꾸려면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신념을 아직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내가 직업으로서 정치인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정치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지만 난 적극적으로 우리사회의 진보를 위해 정치의 길에 서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고 체념 했다. 하지만 가난한 국민도 나라의 주인이 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가난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난한 자들이 권력을 갖는 것’이라고 난 믿는다. 희망의 정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지난 2010년에 처음으로 용산구 원효로에서 구의원에 출마했다. 민주노동당 용산구 당원들의 투표를 거쳐 후보로 정해졌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마흔 한 살에 힘차게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진보정당 출신이 풀뿌리 정치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6월초가 투표일이었는데 2월 하순부터 예비후보를 등록해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말 열심히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만났다. 선거운동은 어떤 후보보다도 열심히 했지만 결과는 12.12%, 2천표 정도를 얻고 낙선했다. 예상한 결과였다. 아니 예상보다 많은 표를 받았다는 표현이 맞다. 동네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정당 지지율도 낮은데 12%를 얻은 것은 참 좋은 성과였다. 선거 다음날 이틀 정도를 쉬고 감사인사 명함을 제작해 선거운동을 도와준 주민분들과 당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열심히 하러 다녔다. 낙선인사를 다녔더니 어떤 분은 당선된 줄 알았다고 했고 어떤 분은 “떨어졌는데 인사는 왜 다니냐”며 웃으셨다. 90일 넘게 선거운동을 해보니 선거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선거운동기간이 지겹게 길었다. 또, ‘후보를 돕는 것과 후보가 되어 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느꼈다.
힘들기는 했지만 선거운동 과정은 참 재미있기도 했다. 주로 선거운동으로 한 일이 명함 배부 인사였는데 후보 명함을 10가지 정도 제작해 받아보는 주민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시도했다. 특히, 남한산초 같은 행복한 학교, 꿈을 키우는 동네 도서관 만들기, 친환경 무상급식 실시 등 교육관련 여러 주제로 명함을 드렸더니 어떤 학부모는 “이원영씨 것은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있다”고 이야기도 해주었다. 선거 유세는 트럭 유세차 대신에 전기 자전거를 소박하게 꾸며 동네 골목,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 이것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붉은 색깔의 앞치마를 두르고 상가방문을 하면 식당이나 옷가게에 모여앉아 있던 아줌마들이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선거 포스터도 특이하게 주방장 모자를 쓰고 급식 식판을 들고 있는 사진을 제작해 붙였다.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하면서 공원이나 가게에서 주민들을 만날 때는 선거 공보물을 스케치북에 붙여서 구청과 구의회의 문제점, 어떤 구의원이 될 것인지 포부와 정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친절하게 설명했는데 참 인기가 좋았다. 기초의원 출마와 낙선의 추억은 실패의 쓴 맛보다도 행복한 여운이 많이 남은 경험이었다.
기초의원 출마이후 민주노동당 용산구위원회 위원장을 2년 가까이 맡아서 일했다. 다행히도 보광동, 한남동에서 출마했던 설혜영 후보가 구의원에 당선되어서 구의원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구의원들의 잘못된 관행이 무엇인지를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왕따를 당하면서도 치열하게 구의원 활동을 하는 설혜영 의원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구의원들이 바뀌어야 주민들이 더 행복해질 텐데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2013년 작년 5월부터 마사회와 화상경마장 반대 싸움을 하면서 정치의 중요성을 더 많이 느끼고 있다. 아직 주민들은 힘이 약하다. 선거 때는 선택의 강력한 권한이 있지만 평상시에는 주인 대접을 못 받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구청장, 구의원들이 주민의 편에서 경마장 싸움을 열심히 해주지 않고 있어서 학부모들이 가슴앓이를 하며 답답해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힘없는 주민들의 손발이 되고 입이 되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정치인이 많아져야 사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나도 그런 사회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고 싶다.(2014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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