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밭갈기

<15>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지리산에 가고 싶다.

보리아빠 이원영 2014. 2. 9. 11:24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지리산에 가고 싶다.

 

이십대 초반 대학 때 친구들과 처음으로 지리산을 갔었다. 그 때는 텐트도 배낭가방에 올려 싣고 산을 올랐다. 지리산 종주는 꼭 해보고 싶은 작은 꿈이었다. 산을 많이 다녀본 것도 아니지만 지리산이 내게 어서 오라그렇게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차례 지리산엘 다녀왔다. 종주도 4번은 한 것 같고 중산리, 백무동, 화엄사 등 12일 산행도 4-5번을 했다. 기영, 숙영 동생들과도 함께 여름 산행을 했었다.

 

지난해 여름에는 아이들과 노고단을 올랐다. 물론 산책 수준의 두 시간짜리 등산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한 첫 지리산행은 가슴 벅찼다.

 

 

많은 산을 다닌 것도 아닌데 항상 마음속에 지리산이 그립다. 끝없이 펼쳐진 산등성이들, 깊은 계곡과 주목나무 숲, 가을 단풍과 갈 때마다 축축하게 내린 산 비가 그리움에 담겨있다.

10년전 결혼을 한 이후 아이를 키우면서 지리산엘 한 번도 가지 못했다. 갈수 없는 곳도 아닌데 못갔다. 그래서 더 그리웠었다.

 

가끔 힘들고 외로울 때 지리산 산길을 걷고 싶은 생각이 든다. 지리산 둘레길이 생겼는데 봄이 오면 봄길을 걷고 싶다.

 

처음에 지리산을 갔을 때 그 깊은 골짜기에 놀랐었다. 깊은 계곡의 큰 바위들과 웅장하게 흐르는 물, 가파른 산기슭을 바라보면서 처절한 역사 속에 죽어간 이들의 피눈물이 겹쳐져 떠올렸다.

가만히 지리산의 추억을 더듬어 보지만 느낌만 있을 뿐, 함께 한 사람들의 얼굴만 떠오를 뿐, 아스라한 지리산의 풍경만 떠오를 뿐 참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자 했던 사람과 젊은 혈기를 품고 살고자 했던 뜻이 맞는 사람들과의 산행이 등걸뿌리처럼 각인된다.

 

기억을 더 구체화하고 싶어 지리산에 대한 책을 찾아 책꽂이를 둘러보았다. 잘 찾아지지 않는다. 컴퓨터로 인터넷을 뒤져 보었다. 눈에 띄는 노래가 있다. 시 구절을 들여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노래가 일렁인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지리산 시인 이원규님 노래 안치환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면

마마의 둔부를 스치는 유자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 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려면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 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시라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몇 년전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참 재미있게 킬킬거리며 읽었었는데 이 시를 쓴 이원규 시인이 바로 그 책에 나오는 낙장불입 시인이란다. 이조차도 가물가물 거린다.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말이야 그렇지만 지리산은 아무 때라도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각설하고 올해 봄에는 꼭 지리산엘 다녀오리라. 지리산 향기를 맡으면서 걸어보리라.(2014년 29일-보리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