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이야기

서울 청파교회와 김기석 목사,지친 도시인에 평안주는 ‘정갈한 샘’

보리아빠 이원영 2009. 10. 15. 10:55

서울 청파교회와 김기석 목사,지친 도시인에 평안주는 ‘정갈한 샘’

[2009.09.25 17:30]   모바일로 기사 보내기


깊은 산 속 수도원을 찾는 기분이었다. 도심 속에 있지만 왠지 고요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 서울 청파동 청파교회는 그랬다. 지금의 서울역 뒤켠, 101년 전 남대문 밖 가난한 민중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립된 교회는 긴 역사에 어울리지 않게 아담한 모습이다. 마치 다닥다닥 붙은 서민들의 집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듯.

꼿꼿하지만 겸손함을 잃지 않는 김기석(52) 담임목사의 모습도 이런 청파교회 분위기와 닮았다. 누구는 그를 물 같다고 한다. 어떤 이는 곰국 같다고도 한다. 그만큼 맑고 편안하면서도 끝 모를 깊이를 간직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넌지시 이런 농을 던져봤다. “도심이 아니라 차라리 농촌이나 산 속에서 목회하시는 게 어울릴 것 같은데요?” 돌아온 답변 역시 농이었지만 예사롭지는 않았다. “요즘 멀리서 청파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도시 한복판에서도 한 모금 시원한 물을 얻어 마실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남에겐 아낌없이,스스로에게는 인색하게=창립 100주년이던 지난해 적지 않은 헌금이 걷혔다. 김 목사는 ‘낡은 교회 건물 보수에 약간이라도 쓰겠지’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교인들은 그 돈을 캄보디아 우물 파기, 몽골 사막화 방지 사업, 마이크로 크레디트에 몽땅 기부해 버렸다. 교인들 성향이 원래 그렇단다.

그렇게 말하는 김 목사의 성향도 다르지 않다. 10여년 전 김 목사는 높다랗던 교회 담장을 모두 헐었다. 노숙자들이 교회 마당 벤치를 차지할 거라며 걱정하는 교인들을 김 목사는 이렇게 달랬다. “그래도 길바닥보다는 교회에 누워 있는 게 노숙자들에겐 안전할 겁니다.” 지금도 청파교회 마당 벤치는 노숙자들이 차지할 때가 많다.

청파교회 주보는 재생용지로 만든다. 주일 점심시간이나 수양회 때 잔반 안 남기기로는 한국 교회에서 청파교회를 따라올 곳이 없다. 3박4일 수양회를 해도 잔반이라야 양동이 바닥도 채 못 덮을 정도라는 게 김 목사의 설명이다.

목양실 소파는 나이를 어림잡기 힘들 만큼 구식이다. 고 박정오 원로목사가 중고를 구입해 쓰던 것을 김 목사가 그대로 쓰고 있다. 김 목사도, 교인들도 교회 건물 꾸미는 데는 통 관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처럼 남에겐 아낌없이 퍼주지만 스스로에게는 무척 인색한 게 청파교회의 특징이다.

여느 교회처럼 시끌벅적한 프로그램은 찾아볼 수 없다. 가끔 찾아오는 타 교회 교인들이 청파교회에 와보고는 “도대체 무슨 재미로 교회엘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한다.

2년 전 소천한 박 원로목사는 김 목사에게 멘토 같은 존재다. 81년 전도사로 청파교회에 부임한 김 목사에게 당시 박 담임목사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내 목회는 울타리를 좁게 쳐서 양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게 아니야. 널따랗게 울타리를 쳐 양들이 마음껏 뛰놀게 하는 거지.” 사회에서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구석진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교회=김 목사도 그런 목회 철학을 그대로 밟아오고 있다. 교회 홈페이지엔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등 구석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분명한 목회 방침을 밝히고 있다. 그는 “신앙생활은 신앙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이라고 했다. 신앙이 이웃 사랑이나 삶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 ‘자폐적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김 목사는 “청파교회를 다니는 청년들 중엔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하거나 시민운동에 뛰어든 이가 여럿”이라며 우려 아닌 우려를 했다.

김 목사는 스스로를 구도자(求道者)라고도 했다. 구도를 위해 감리교신학대 신학과에 입학했고, 목회자인 지금도 구도는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는 구도 과정에서 주어진 역할일 뿐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때론 목회 과정에서 구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쉽다”며 “구도가 본령이고 그 구도 과정에서 얻는 힘으로 목회를 감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도자는 안주할 수가 없다. 그의 목회가 치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는 아침에 어떤 교역자보다 먼저 교회로 나온다. 김 목사는 “직장인들이 몸 안 좋다고 출근 안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으냐”며 “목회자에게 그런 치열함이 없다면 교인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12년 전 담임목사가 됐지만 안식년은 꿈도 못 꾸는 이유도 치열함 때문이다.

김 목사의 설교는 정평이 나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거울 같다. 듣는 이의 내면은 물론 사회의 구린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기엔 소년 같은 해맑은 정신, 그리고 복음의 본질을 통해 현실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표현력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잡담하는 목사=김 목사는 80년대 한 기독교 잡지에 기독교의 눈으로 문학 작품을 비평하는 글을 연재해 ‘문학평론가’란 칭호를 얻었다. 그의 문학 소양은 신학대 1학년 때 읽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가 가져다준 것이다. 자신 또래의 작가가 쏟아놓는 거침없는 문학 비평에 충격받고 아웃사이더에 나온 책들을 몽땅 읽기로 작정한 게 계기가 돼 지금도 문학 서적을 놓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와 인문학이 시선을 교차하면서 서로 풍요로워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매주 토요일 교인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시작한 게 벌써 16년 전이다.

지난해부터는 ‘잡담회’도 시작했다. 한 달에 한번 주일 오후시간에 갖는 말하기 좋아하는 교인들과 담임목사의 잡담 시간이다. 주제는 자신의 신앙에서부터 시국까지 그야말로 잡다하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서 힌트를 얻었다. 김 목사는 “각기 다른 전공자들이 서로 얘기하다 보면 마치 불꽃이 튀듯 온갖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나름대로 원칙도 있다. 연예인 얘기는 금물. 다른 사람의 잡담을 듣고 비판하는 말을 해서도 안된다. 잡담이지만 생산성을 고려한 것이다.

김 목사의 안내를 따라 올라간 교회 옥상. 좁다란 이곳엔 까만 패널의 햇빛발전소가 있다. 서울의 교회 중에서는 최초로 2년 전 세운 것이다. 볼품 없는 발전소지만 설명을 들으면 입이 절로 벌어진다. 발전소가 절감하는 이산화탄소량은 30년 된 나무 200그루와 맞먹는다. 한 달에 한국전력에 판매하는 청정에너지 25만원은 동사무소가 알려주는 동네 에너지 빈곤층에게 전액 지원한다. 김 목사는 “교회 옥상에 아름드리 나무 200그루가 심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숲 속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든다”며 발전소 앞에서 심호흡까지 해 보인다.

도심 속에 있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꼿꼿함을 지키고 있는 청파교회는 교회와 세상 모두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만 같다. 지치고 목마른 도시의 영혼들에게 산 속 수도원 대신 도심 속 청파교회를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