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밭갈기

<9> 다섯 남매의 장남으로 감사하며 살아가기

보리아빠 이원영 2014. 1. 16. 01:54

 

우리나라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이다. 출산율이 낮으면 인구가 자연감소하게 되고 이 때문에 고령화 문제도 발생하게 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를 겪으면서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지만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내가 태어날 때만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출산율을 낮추려고 정부차원에서 반강제적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으니 시대가 많이 변해도 참 많이 변한 것이다.

 

나는 70년 개띠이다. 어디 가도 70년생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만큼 그 때는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특히, 인구통계를 봐야 알겠지만 70년생이 더 많이 태어난 것 같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 만해도 작은 산골마을에 동갑내기가 10명이나 되었다. 다들 어디서 뭐하고 잘 살고 있는지?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들아! 잘 살거라!

 

양평의 같은 면에서 중매로 아버지 나이 스물아홉 살에 늦게 결혼한 세 살 차이의 우리 부모님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으셨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우리 남매들은 아들 딸 아들 딸 아들 순으로 모두 두 살 차이다. 얼마나 절묘한 출산인가? 이런 놀라운 조합에 동네 분들은 정말 부러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올망쫄망한 어린 동생이 네 명이나 되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하루 종일 지지고 볶고 싸우던 동생들이 내게 달려와 낮 동안 있었던 일을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한 명씩 순서대로 이야기해라!” 하도 정신없어서 이야기 할 차례를 정해주었다.

농사짓는 부모님은 들에 나가 계셨기 때문에 오후에 동생들 돌보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래도 형제가 여럿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잘 놀았다. 형제가 여럿이면 부모가 일일이 신경 쓰고 간섭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우리 남매가 그랬다.

 

그 당시 많은 어르신들이 그랬듯이 부모님은 장남에 대한 특혜를 많이 주셨다. “장남이 잘해야 동생들도 잘 큰다.”는 부담과 함께 먹을 것과 동생들을 관리할 권한을 내게 부여해 주신 것이다.

특히, 없는 살림이었지만 집에서 키우는 닭으로 계란은 자주 많이 먹었는데 계란을 삶거나 후라이를 하면 동생들에게는 한 개씩 주면서도 장남이 나에게는 두 개를 주셨다. 그 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조금씩 철이 들면서는 그런 특혜를 받은 것이 동생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또 많이 후회가 되는 것은 중학교 다니기 전 까지만해도 동생들을 많이 때렸던 점이다. 일종의 규율을 잡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한 창 뛰어놀 나이에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니 상당히 동생들을 성가시게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친구들과 산과 들로 다니면서 계절 먹거리, 과일인 찔레 순이나 벚, 오디, 보리수 등을 따러 가면 동생 한 둘이 꼭 형 누나들과 함께 가고 싶어서 졸졸 따라 붙었다. 그러면 따라 오지 마라!” 야단도 쳤다.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때 까지만 해도 하도 말이 많고 쉼 없이 말대꾸를 하면서 시끄러워 담임 선생님께 촉새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는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장남으로 자연스럽게 성격이 그렇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심리학을 배우면서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정확히 알게 되었다. 물론 말 수가 적은 내 모습을 보고 동네 어른들이나 부모님은 원영이는 참 생각도 깊고 젊잖아.”라고 칭찬을 하셨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는 어린 애가 점잖은 것은 최대의 칭찬이었다. 그래서 애어른 같은 성격이 더욱 굳어진 것 같다.

 

양평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서울에 있으면서 대학을 다니다가 주말이나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생들과 다섯 명이 둘러앉아 놀만한 숫자가 되는지라 재미있게 게임도 할 수 있었다. 그 때는 형제가 많은 게 참으로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어른들이 형제가 많은 게 다복하다고 이야기하는지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동생들은 커가면서 다행스럽게도 장남인 나를 잘 따라 주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내가 시키는 잔심부름도 잘 들었다. 장남의 어깨가 무겁지만 그래도 동생들을 잘 부려먹을 수 있었으니 그도 장남의 좋은 점이었다.

 

대학 3학년 이후부터는 바로 밑에 여동생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취업을 해서 함께 살기도 했다. 한명씩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서울 식구가 늘어났다. 둘째 셋째는 대학을 못 갔고 넷째는 직장 다니다 스스로 힘으로 전문대를 들어갔고 막내는 공부를 제법 잘해 대학을 들어갔다. 없는 살림에 장남이 대학을 갔으니 둘째 셋째는 부모님이 대학을 보내기가 어려웠고 그 때문에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 부채의식이 저절로 싹텄다. 여동생과 함께 살 때는 수입이 있는 동생이 생활비를 대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동생들은 나를 믿고 잘 따랐지만 장남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십대 후반에 방송국 중견 앵커가 쓴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이 책을 사서 읽으면서 나도 장남으로 더 노력해야겠다.’라고 다짐을 했지만 역시 생각처럼 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졸업 후 지금까지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금은 셋째 동생만 빼고 모두 결혼을 해서 애들을 낳고 제법 평범하게 큰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다. 명절 때나 부모님 생신 때 가족들이 모두 모이면 식구가 많고 어린 아이들로 인해 시골집이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이런 날 부모님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절로 흐뭇해진다.

 

자식을 낳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했던가? 나도 부모가 되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농사지어 다섯 남매 교육비, 생활비를 대느라 아버지가 얼마나 힘겨웠을까? 두 살 터울 오남매의 도시락을 아침마다 싸느라, 그 많은 식구의 빨래를 하느라 어머니는 얼마나 고되셨을까?

 

   

     *몇년 전 양평 시골마을에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방문해 추수가 끝난 논에서 부모님 사진을 찍어주었다.

 

크게 위안이 되고 그나마 죄스럽지 않은 것은 용돈도 제대로 못 드리는 마흔 중반의 큰 아들에게, 그리고 장남 노릇도 게으르고 허술하게 살아온 형에게 부모님과 동생들은 항상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해주고 있다. 그저 성실하고 욕심 없이 나름 착하게 살고 있는 것에 고마워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앞으로도 내가 특별하게 해 줄 것은 별로 없다. 철따라 고향집에 찾아가고 형제간에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엊그제 주말에 어머니 생신이어서 양평엘 다녀왔다. 늙으신 부모님은 아직도 내개 든든한 언덕이다. 칠순을 넘겨서도 손발 부지런하고 정정하신 부모님의 건강을 올해도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부모님! 항상 고맙습니다. 동생들아! 고맙다. (2013116-보리아빠의 생각)